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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귀래 별서와 나
박수주
새벽 안개가 쓸고간 젖은 나무숲,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 철따라 피고지는 야생화, 풀벌레와 새들의 합창, 애절하게 우는 잡동새,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방울의 신비한 가락, 여름 하늘에 반짝반짝 빛을 발하며 날아다니는 반딧불이, 은하수에 넘쳐흐르는 별들, 그리고, 그리고........
이런 감동적인 분위기에 살게 된 나의 행운에 감사한다.
어린 시절부터 푸른 초원에 굴뚝이 있는 빨간 뽀죽 지붕 양옥과 평화롭게 풀을 뜯는 젓소, 사과나무 아래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나, 그런 환상을 갖고 있던 나는 운 좋게 30대 후반에 내 꿈에 필요한 시골 땅을 매입하는데 성공했다. 사슴 한 쌍을 미리 구입하여 남의 목장에 위탁사육 하던, 몇 마리로 불어난 사슴가족을 거느리고 내 꿈속으로 입성한 것은 84년 초여름이다. 그때부터 아내, 두 아이의 어머니 노릇이 있는 서울과 사슴이 뛰노는 농장 사이를 곡예하듯 오가며 바쁜 생활을 시작했다.
서울집 작은 살림도 남의 도움을 받으며 꾸려가던 처지에 시골농장 까지 돌보려니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형편이었지만 힘든 줄을 몰랐다. 꿈을 이루었다는 성취감은 나를 슈퍼우먼으로 만들었나보다. 나무심고, 꽃 심고, 가꾸고 사슴치다꺼리하고 또 집에 달려가 살림 돌보고 눈 코 뜰 새 없었지만 전원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에 도취하여 힘겨워할 틈도 없었다.
가족들에게 소홀한 만큼 불평을 듣지 않기 위해 눈치봐가며 들락거려야 하는 목장이었지만 얼마나 신바람이 났는지 모른다. 가을에는 건초를 준비하기 위해 일군들과 산에서 살다시피 했다.
가을장마라도 든 해는 베어놓은 건초감을 말리지 못하고 썩혀, 이산 저산 찾아다니며 다시 해야 했고 6개월 이상 먹여야할 건초를 못하게 될까봐 얼마나 전전긍긍했던가, 전쟁터를 연상시키던 건초장만 작업은 어려움이 많았지만 생동하는 노동현장에서 협동하는 즐거움도 적지 않았기에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 후 끝없이 상승하는 인건비 때문에 중국에서 갈잎을 수입하게 됐고, 건초를 살 수 있고 부터 수월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일거리는 무궁무진 했다. 나는 경제적인 자립이 가능해야 전원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사슴사육에 비중을 두었고 지금은 산귀래 별서에 갤러리와 카페를 포함시킨 것이 그것이다. 경영 수완이 있고 없고는 개인 능력이지만 아무튼 기본은 그렇다는 뜻이다.
산귀래 별서를 조성하며 마음고생, 몸 고생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지만, 이런 나를 사람들은 욕심이 많아 일거리를 만든다고 한다. 나는 운명적으로 놀고먹을 팔자가 못되는지 나의 의지보다는 주위 여건이 그렇게 돌아간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이미 전원에 삶의 터전이 마련돼 있었고, 남편과 사별로 연금을 승계했고, 또 경제 기반도 든든한 상태였기에 그냥 그대로 유지했다면 안정되고 편안한 생활이 보장된 터였다.
허나 나는 편한 생활을 포기하고 그 자금으로 산귀래 별서를 계획했다. 끝없는 갈망과 도전정신, 사회에 필요한 존재로 남고 싶은 욕구가 적지 않은 나이를 무시하고 새로운 도전에 자신을 몰아세운 것이리라. 별서 공사로 자금난을 겪으며 사슴들을 매각했다.
20년 사슴사육을 접으며 너무 섭섭하여 꽃사슴 몇 마리를 구입하여 명맥은 유지한다. 빈 사슴장이 되고만 기존목장엔 살림집과 도자공방 두동의 비닐 육모하우스, 그리고 사육장에서 밭으로 돌아가고 있는 공터로 남아있고, 94년부터 조성하기 시작한 별서는 2만2천 여 평에 갤러리, 카페, 사슴장 연못 등 기본구조에 엄청나게 많은 양의 야생화를 식재하여 테마가 있는 식물원으로 조성해가고 있다. 아직 제대로 정리하자면 멀고 험난하기만 하여 살살 도망가 버리고 싶기도 하지만 그만둘 수 없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들꽃을 마음껏 심고 가꿀 수 있기 때문이다.
새벽 날이 밝기 무섭게 뛰어나가 비닐하우스 안에 배양하는 종자들 포트에 옮기고, 포트에서 자라는 종묘들 보살피고 물주고 그리고 아침밥 한술 뜨고 별서로 내려가 꽃모종을 옮겨 심고 풀 뽑고 하노라면 하루가 짧기만 하다. 풀은 왜 그리 잘 자라는지, 농사란 풀과의 전쟁이다. 우리농장은 처음부터 제초제를 쓰지 않았다.
한번 뿌린 제초제가 중화되는데 28년이나 걸린다는 것을 알아서였다. 풀과의 전쟁에서 지고 말아 풀 농사를 짓기 예사였지만 풀도 이 세상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풀만 죽이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 미치는 고엽제의 피해를 나부터 줄여보자는 생각에서였다. 근래 들어 폐해를 인식한 양평군에서 제초제 안 뿌리기 캠페인을 벌린다.
이천만 수도권 시민의 상수원 오염을 줄이기 위해서 수시로 공무원들이 돌아보고 홍보 계도한다. 덕분에 우리 목왕리도 올해는 한집도 제초제를 뿌리지 않았다. 논두렁 밭두렁 풀 깍느라고 주민들이 좀 더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몫이 아니겠는가. 꽃밭에 엎드려 풀을 뽑고 있으려니 아들 며느리와 꽃구경을 온 할아버지가 주인이냐고 물어보고, 이런 재산가가 손수 막일을 하느냐며 신기해한다.
남들 눈에는 부자로 보이는 모양인데 정말 내가 부자인가? 자문해 본다. 하기사 땅 한뼘 갖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몇만평이나 소유하고 있으니 그 노인의 말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시골땅이란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할 일만 많아 지는 게 아니겠는가, 오죽했으면 일거리에 견디다 못해 포크레인 중장비를 사들여야 했겠는가.
언젠가 무거운 것을 잡아당기다가 허리를 다쳐 꼼짝할 수가 없어 병원에 실려갔다. 의사는 척추뼈 3지와 4지 사이의 연골이 반으로 줄어든 x레이 사진을 보여주며 힘에 겨운 일을 계속하면 디스크로 발전하여 평생 고생을 할 것이고, 몸을 아껴야 무사히 일생을 살아가게 될터이니, 선택은 자신이 할 일이라며 협박을 했다. 은근히 캥기고 겁이났지만 일 중독에 걸린 내가 쉴턱이 없었다. 그후 x레이를 다시 찍어보았다. 연골의 높이가 다른 부위와 똑같아져 있지 않은가. 맑은 공기, 들꽃, 나무들과 함께 하는 노동은 건강유지에 장애가 되지않는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며칠 전 용담밭을 매고 있었다. 여귀 싹이 얼마나 많이 올라왔던지 용담과 외모가 비슷하여 자꾸만 용담이 뽑혀 나온다. 아까워라. 가을이면 한 대궁에 꽃이 몇 송이나 필텐데, 이틀이나 구부리고 일한 덕분에 풀밭 같던 용담밭이 가지런해졌다.
딱 딱 딱....... 경쾌하게 나무 찍는 소리가 들려온다. 숲이 깊어 딱따구리란 놈이 가끔 온다. 머리에 붉은 점이 있는 놈이 썩은 나무 등걸을 정신없이 찍고 있다. 가까운 거리에 사람이 와 있는 것을 알터인데도 동요하지 않고 하던일을 계속하여 한참 보고 있던 나는 조용히 물러난다.
이곳엔 까치 같은 텃새도 있지만 여러 종류의 새들이 철따라 왔다가 돌아간다. 작은새, 큰새, 예쁜새, 목소리가 아름다운 새, 등등 그중 부리가 주황색으로 두툼한 청색 호반새는 해마다 같은 나무 등걸에 뚫린 구멍에서 새끼를 길러 떠나곤 한다.
해마다 같은 부부 새가 오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새끼인지 알수 없지만 그 새들에겐 이 나무 구멍이 고향이 아니겠는가, 먹이를 물고 와서 먼 가지에 앉아 주위를 살펴보고야 제집으로 들어가는 조심성 있는 새를 이웃으로 환영하지만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더라도 섭섭해하지 않는다. 다음해도 다시 돌아와 알을 낳고 새끼를 키워 비행훈련이 끝나면 떠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시설과 면적을 지닌 별서엔 항상 많은 일로 넘쳐나지만 일을 거들 인력이 모자라 곤란을 당한다. 오죽하면 전년도에 결혼을 한 딸이 불룩한 배를 하고 서울 제 집에서 이곳으로 출근을 하겠는가, 카페 주방을 맡을 사람을 못 구해서 이다. 야생화 가득한 아름답고 청정한 이곳에서 보수에 지나치게 신경 쓰지 않고 조용하게 함께 살 사람이 어디 없을까, 딸아이가 몸을 풀기 전에 우리들과 화합할 수 있는 좋은 동료를 맞게 되길 기원해본다.
이곳 별서에는 세 개의 연못이 있는데 백연을 기르기 위해 자그마한 연못을 하나 만들었고, 큰 연못은 물이 새고 있어 비단잉어를 넣기로 한 처음 계획을 유보하고 있다. 장마철이면 못 그득 물이차지만 요즈음 같은 가뭄에는 높은 쪽 바닥이 들어날 만큼 수고의 격차가 심해 수생식물을 제대로 키울 수 가 없다.
연못의 물 높이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리 방법을 언젠가는 찾게 되리란 희망만 있을 뿐, 한 해는 낙엽이 떨어져 쌓여 너무 지저분하기에 못의 물을 빼고 청소를 했었다. 그 사이에 생태계가 형성되 꺽지, 피라미, 우렁, 올챙이 등 다양한 수생동물이 살고 있지 않은가, 아이들이 놀러왔다 개울에서 잡은 것들을 연못에 넣고 갔는데 그것들이 자라 새끼를 쳐 식구가 는 것이다. 그 후로는 연못물이 지저분하게 보여도 그대로 두기로 했다. 새는 물을 잡으려면 황토를 몇 차 받아 바닥에 깔아보라는 충고를 받아보았지만 결단을 못 내리겠다.
연못을 팔 때 암반이 나와서 암반은 그대로 두고 공사를 하여 바닥 깊이가 너무 차이가 심해서이다. 수련이 제법 많이 피기 시작한 작은 연모엔 못 주변으로 창포를 심었다. 그 못에는 왕대 잠자리 애벌레가 살고 있었는데 요즈음 창포잎으로 기어올라 허물을 벗어두고 날아간다.
창포 잎 마다 벗어놓은 많은 허물들이 고스란히 붙어있어 볼 때마다 신기하다. 우화하는 모양을 보기위해 이른 아침에 못가에서 기다리노라면 꼼지락꼼지락 허물을 벗고 한참동안 날개를 말리고야 날아가는데 낮이면 몸체가 녹색인 이 연못 출신인듯한 대잠자리가 날아와 못 위를 빙빙 날아다닌다. 알을 낳기 위해서라면 좋을텐데, 내년에는 더 많은 유충들이 서식하여 잠자리가 되어 날아다니게 될 것 같아 기다려진다.
문명이 발전하고 생활이 윤택해 질수록 도시 사람들은 자연을 그리워하고 꽃과 나무와 작은 곤충들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한다. 육종된 화려한 꽃보다 개량되지 않은 야생화를 선호하게 된다는데, 우리도 1-2년 사이 강렬한 야생화 붐이 일고 있는 게 아마도 선진국으로의 진입과정이 아닐까, 기대가 된다.
산귀래 별서에서 두 번째 들꽃 축제를 열고 있다. 그동안 심고 가꾸어온 들꽃들의 수량도 수량이지만 아름다운 꽃들의 잔치를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고, 한편으론 자랑하고 싶은욕구도 발동해서다. 집의 공방에서 만들어낸 개성 있는 화분에 심어진 야생화들의 자태가 곱다.
요즈음 이곳은 여름구절초가 청초한 흰색으로 수십만 송이가 어우러졌고 흰색 노란색 청색 짙은 남색 등 갖가지 붓꽃들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아직도 사라지기 아쉬운 각양각색의 매발톱들이 꽃송이를 매달고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꽃들의 아우성으로 날이 밝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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