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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珍 박 기 옥
봄이 오고 있다. 올 봄은 유난히 비 오고 바람 불고 눈까지 내려 변덕스러웠다. 3월 중순에 눈이라니! 옛날 같으면 감히 ‘재앙’이라 말할 수도 있는 날씨였다. 흉노군에 끌려간 왕소군의 심정을 기려 ‘봄은 봄이되 봄 같지 않다(春來不似春)’던 당나라의 시구가 생각나는 봄이 아니던가.
신기한 것은 절기다. 눈이 오거나 비가 오거나 태풍이 불거나 상관없이 남쪽에서는 어김없이 봄소식이 날아온다. 강과 바다가 잠에서 깨어나고 벚꽃, 목련, 산수유가 향기를 날린다. 복사꽃은 아직 이르다. 꽃에도 질서가 있는 것이다. 개나리에 이어 진달래, 철쭉이 온 산을 붉게 물들이고 나면 정원에서는 장미, 라일락이 여왕처럼 맵시를 뽐낼 것이다.
봄꽃의 으뜸은 단연 매화다. 매화로 해서 겨울이 물러가고 봄이 오는 것이다. 그러게 매화는 매서운 한 겨울의 추위를 뚫고 고고하게 꽃망울을 터뜨려서 사랑을 받는다고 하지 않던가.
또한 매화는 그 작고 얇고 단아한 자태로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이상하게도 매화 향기는 코가 아니라 눈으로 맡아진다. 꽃망울 터지는 소리도 귀를 거쳐 눈으로 들려온다. 옛 선비들은 깊은 밤 동구 밖 흰 눈 속에서도 매화향이 느껴진다고 노래했다. 꽃잎에 이는 바람에도 잠 못 이루는 순백의 영혼만이 매화의 진가를 알 수 있다는 뜻이리라.
섬진강변의 매화 꽃 그늘에 앉아 강물을 그윽히 바라본다. 백운산 산자락에 만발한 꽃무리가 흰 모래 푸른 물과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것 같다. 강은 말이 없고 꽃은 미소짓는다. 바람이 불어와 꽃잎을 슬쩍 날려보지만 물은 오히려 하늘을 향해 비늘을 드러낸다. 구름 한 점 없는 쪽빛 하늘이 빙그레 웃는다. 봄볕이 고양이처럼 살그머니 다가와 꽃과 물을 핥는다.
강 언덕 위에 오래된 매화등걸이 보인다. 100년은 족히 넘었음직한 고목이다. 고사 직전 응급치료를 한 듯 뿌리와 몸통을 시멘트로 이어 놓았다. 무성의하고 졸렬한 방법으로 나무등걸에 시멘트를 덕지덕지 발라놓은 것이다.
몸에서 나온 가지는 이미 반 이상 잘려나갔다. 분신을 잃고 남은 몇 가지가 민망한듯 조용히 팔을 뻗고 있다. 신기한 일이다. 아무도 봐 주는 이 없는 늙고 초라한 나무등걸이 저 거칠고 차가운 시멘트를 뚫고 뿌리로부터 물기를 뿜어 올리다니! 저토록 튼실한 몸통과 가지가 있기 위해서는 뿌리는 또 얼마나 깊이 멀리 뻗어 있어야 할까.
시끄러운 꽃을 뒤로 하고 나무 등걸로 다가간다. 거친 나무껍질을 손으로 쓸어본다. 험한 가난과 숱한 전쟁을 겪었을 세월이 온기를 지니고 전해오는 듯하다.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를 만난 듯 가슴이 뭉클하다.
꽃들아, 잘난 척 하지 마라. 세상의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가녀린 뿌리 하나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니. 꽃의 사랑 꽃의 환희도 뿌리에서 길어 올린 빗물 한 방울에서 만들어지지 않던가.
어디선가 작은 새 한 마리가 매화 등걸 위에 날아와 앉는다. 온 몸이 하얀색 깃털을 한 새다. 까치인가? 하얀색 까치는 길조(吉鳥)로 알려져 있다. 오늘 아침 누군가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왔을 것이다.
여인의 넋인가? 매화라는 기생의 화신(化身)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녀는 매화 옛 등걸에 피지 못하고 있는 꽃을 안타까워했다. 봄이 돌아와 옛 피던 가지에 매화꽃이 핌즉도 한데 춘설(春雪)이 난분분(亂紛紛)하여 필동말동 하다고 세월을 읊었다.
길조든 여인의 넋이든 무슨 상관있으랴. 매화 옛 등걸에는 지금 꽃 대신 새가 앉아 있다. 함께 봄을 즐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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