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축시장 정경
정 목 일
쓸쓸한 공터에 수백 개 말뚝이 박혀 있는 가축시장에 장이 서는 날이면, 아침 일찍 주변에 한두 개 천막이 처지게 된다. 막걸리나 국수를 파는 간이 음식점들이다.
아직은 가축을 몰고 오는 사람들도 없는 아침인데, 서서히 행상들이 모여들기 시작 한다 행복이 소담스럽게 들어 있는 십년 책력과 토정비결을 몇 권 늘어놓고 천연스러히 자리 잡은 촌로의 주름진 얼굴은 언젠가 몇 번 뵈온 것 같은 먼 친척 할아버지 같아 보인다. 인정이 있어 보인다. 하얀 수염이 손금이나 사주팔자, 관상쯤은 넉넉히 볼 법하고, 한 번의 관상으로 행인의 미래를 예언해 버릴 듯싶다.
또 늙은이는 그들대로 이웃하여 말상대하기 좋도록 나란히 장죽이며, 곰방대, 쌈지, 지금도 어디 알뜰히 시골양반 체신 지키는 노인들이 있는가. 있길래, 갓이며 망건들을 몇 개 소중스러히 어울려 놓고 일찍부터 손님을 기다리는 고집스러운 노상인도 기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양말이며 제법 빛깔 좋은 옷가지를 풀어 놓은 옷 전 위로 아침 햇살이 쏟아질 때, 일찌감치 집을 나선 농부들이 마치 형제간처럼 정다워 보이는 가축들과 어슬렁어슬렁 걸어오고 있다.
황소 고삐를 붙잡고 황소 같아 보이는 농부들이 ‘이랴, 자랴…’ 이야기 주고받으며, 나들이 가는 양 오고 있다. ‘꿀꿀꿀…’ 육자배기처럼 구수한 목소리를 내지르는 돼지 이리저리 몰며, 담뱃대에 풍년초 담배를 연신 빠곰빠꼼 빨아들이는 농부가 돼지 궁둥이 뒤로 뒤뚱뒤뚱 걸어오고 있다. 열두 마리 돼지새끼 낳아 두세 마리 씨 할 돼지 모셔 놓고, 푸대에 넣어 지게에 지고 오는 흐뭇한 길순이 아버지, 벌써 막걸리 한 잔에 흥얼흥얼 기분이 좋다.
어느 덧 가축시장은 북적댄다. 가축과 사람들이 반반씩이다. 어쩌면 옛 핫바지 저고리처럼 입은 옷들도 그렇게 비슷비슷 할 수 있을까. 격식과 멋이라고는 필요 없는 시골사람들, 모두 따뜻하게 털오바나 두툼한 잠바들을 입고 있다. 어디에 내어 놓아도 얼른 알아볼 수 있는 모두 모두 형제와 같아 보이는 시골 사람들이 이리저리 햇빛 속에서 어울리고 있다. 맑은 햇빛을 많이 받아 얼굴은 거무스레 대추 빛이고 모처럼 시장 출입 만만찮게 보이려 털오바나 말쑥한 잠바 차림새이지만, 어딘가가 허수룩해 보이고, 옷에서 구수한 여물 내가 술술 스며날 것 같다. 말 수는 적으나 맑은 공기를 마시고 지낸 목소리는 우렁우렁 울리는 듯 크고, 손도 아주까리 잎처럼 우악스럽게 크기도 하다.
그들을 따라 나온 가축들도 주인을 닮아서인지 별로 말수도 없이 주인과 나란히 서서 마지막 정을 서로 아끼며 서 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기를 쓰고 팔려고도 하지 않고 다만 값을 묻는 이에게 대답만 해줄 뿐이다.
애써 길렀는데 어찌 정인들 없으랴. 한 집안에서 같이 지낸 한 식구가 아니었는가. 뻐꾸기 우는 봄부터 논밭의 일터에서 동고동락하던 소가 아니었는가. 어이 목숨이 없는 물건을 사고파는 일에 비길 수 있으랴. 농부들은 무뚝뚝한 표정으론 나타내지 않지만 그 동안의 인연과 정을 되새겨 아끼며 서로 애틋한 정을 주고 파는 일임을…….
농부들의 표정엔 하나같이 간절한 정과 소망이 흐르고 있다. 시집보낼 딸의 행복까지, 대학 등록금을 받아 쥘 아들의 출세까지를 상상하며, 애써 정들여 온 가축들을 행복과 맞바꾸기라도 하듯, 담담히 흥정을 하는 것이다.
사과 상자나, 생선 상자로 만든 간이 우리 속에, 돼지들은 모든 운명을 알아차린 것 같이 점잖은 소들과는 달리 철없이 연신 꿀꿀거린다. 돼지를 사고파는 것쯤이야 마음이 좀 덜하지 않겠는가. 돼지들처럼 시끌시끌 떠들기도 하며 왁자지껄 잡담을 즐기기도 한다.
군데군데 아기소리처럼 끔찍한 소리를 내기도 하는 염소랑, 아낙네들이 광주리에 이고 온 고양이, 닭들도 눈에 뜨인다. 구전을 받아먹는 흥정꾼만 돌아다니며 입이 바쁘다.
흥정이 끝난 사람들은 천막 친 음식점 땅바닥에 펴놓은 돗자리에 앉아 돼지 국물에 얼큰히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어떤 이는 사발 채 들고서 몇 젓가락 되지 않는 국수를 말아 입 속으로 훌훌 빨아들이고 있다. 한 가운데 복(福)자 써놓은 사발이 금세 비어지고 있다.
흥정이 끝났다 하여 그만 어찌 돌아가겠는가, 가축을 사고파는 일, 정을 나누는 일이거늘 무심히 그냥 갈 수 있겠는가. 그래도 막걸리라도 한 되 마시고, 장에 간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간 갈치나 굴비라도 몇 마리 사들고 기분 좋게 들어가야 되지 않겠는가. 자루에다 새끼 돼지 서너 마리 사 넣고 꽥꽥 거리는 자루를 낑낑대며 메고서 간신히 버스에 실은 젊은이가 동네 사람들에겐가 손을 흔들고 있다.
이 가축시장에, 시골 농부들과 의좋게 함께 살아온 소, 돼지, 염소, 고양이, 닭, 오리들이 서로 모여 수군수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이제 흥정을 끝낸 농부들 하나 둘 막걸리에 얼큰히 얼굴이 붉어져 돌아가는데, 서운해 밥도 안 먹고 아버지를 원망하며 눈물지을 산골 소년은 없을까……. 팔려진 가축들, 순한 새 주인을 따라 가고 있다.
아침 일찍 펴 놓은 촌로의 책력이나 토정비결 책은 몇 권 팔렸을까. 먼지만 자욱이 앉은 갓이나 망건 같은 건 하나라도 팔렸을까. 노인은 노인이라 그런지 사고파는 것에 오히려 무관심해 보이는 얼굴로, 어미 소 따라가는 앳띤 송아지라든지 잔칫날 쓰면 좋을 듯한 살찐 돼지들에게나 눈을 주고 앉았다. 어서어서 흥정 끝내고 순하디 순한 가축들을 데리고 평화로운 시골집으로 돌아가 농사지으며 모두 잘 살았으면 좋겠다. 소, 돼지, 염소, 고양이, 닭, 오리들은 농부의 집에 가득가득 넘쳐나는 웃음과 즐거움이 되어주고, 농부들 또한 가축을 알뜰살뜰 잘 길러 주었으면 좋겠다.
가축시장에 시골 사람들이 정들은 가축들을 몰고 와 애틋한 정을 서로 사고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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