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상자
구 귀 남
내 장롱 속엔 스물 다섯 해 동안 소중하게 간직해 온 편지상자가 있다. 삶의 궤적을 따라 차곡차곡 쌓여있는 그리움의 조각들. 생활이 힘들거나 외로울 때면 가만히 그 상자를 열고 가슴 한 구석에 고이 묻어 둔 지난 추억의 실타래를 조심스레 풀어 보곤 한다.
그때마다 아련히 밀려드는 추억 속에는 남편과 연애시절 주고받던 장미 빛 사연으로부터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 시아버님이 보내주신 소중한 사랑의 글, 글벗들의 초대장과 카드, 혹은 보잘것없는 나의 글을 읽고 칭찬과 격려를 담은 고마운 마음들이 그대로 녹아 있다. 또 아들녀석이 집을 떠나 있는 동안 학교와 군대에서 보낸 눈물 젖은 편지까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마음이 울적할 때는 편지를 꺼내 읽다 보면 당시 보다 몇 갑절 더 큰 의미로 다가와 금세 힘이 솟고 삶의 활력을 찾을 수 있어 너무나 행복하다. 그 글을 통해 어떤 사연으로 답장을 써 보냈는지 순간 순간의 기억을 되살려 보며 혼자 미소를 짓곤 한다.
그 많은 사연들 중에는 읽고 또 읽어 손때가 묻고 닳아버린 편지가 한 통 있다. 그것은 내 나이 스물 세 살 때 남편에게서 받은 첫 편지로 읽을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우리가 마을 아주머니의 중매로 난생 처음 맞선이란 것을 본 것은 새 하 얀 흰눈이 소담스럽게 내리던 1월 1일 이었다.
내심 설레이는 마음을 안고 만난 그이의 첫인상은 착하고 온화해 보였으나 키가 너무 작을 뿐더러 말수도 적어서 영 호감이 안 갔다. 내가 상상했던 키 크고 잘 생긴 서글서글한 이상형은 더구나 아니었기에 부풀대로 부풀었던 기대는 일시에 사그라졌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후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헤어졌다. 그날 저녁, 중매쟁이가 집으로 찾아 왔다.
"신랑은 색시의 첫인상도 괜찮고 성격이 시원시원해 보여 좋다고 하는구먼. 편지라도 전하고 싶다며 주소를 알아 오라고 하니 색시, 주소 좀 적어 주구려."
아주머니의 말씀을 듣고는 퇴짜 맞은 것보다야 기분도 괜찮고 또 '그 사람 내면의 인간성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그만 주소를 적어 주었다. 며칠 후, 그이는 내게 달콤한 말로 첫 편지를, 아니 정식 구혼 장을 보내왔다. 물론 필체도 좋았지만 내용도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받은 편지가 인연이 되어 사흘이 멀다하고 설레는 마음을 열렬히 글로 주고 받다보니, 사랑이 싹튼 것 같다.
그러나 그이는 막상 만나면 자상하고 멋진 글과는 딴판으로 무뚝뚝하여 나를 실망시키곤 했다. 온갖 불평을 늘어놓는 나에게 친정 어머니께서는 가문 좋고, 직장 좋고 착해 보이며 무엇보다 찰떡궁합이니 더 이상 무얼 바라겠느냐며 오히려 나보다 더 좋아 하셨다.
'그래 키 크고 잘 생기면 뭐 하랴, 나 위해주고 속 안 썩이면 되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100여 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사랑이 무르익어 갔다. 그래서 그이가 보낸 첫 편지의 말대로 그해 가을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잔재미 없는 남편에게 결코 후한 점수는 줄 수 없었다. 하루는 남편에게 '사실 그때 내 나이도 어렸고 빨리 결혼하고싶은 마음도 없었는데 당신이 내게 편지하겠다고 주소를 적어달라기에….' 라고 푸념을 했다. 그러자 남편은 펄쩍 뛰는 것이다.
"먼저 편지해달라고 주소 적어보낸 사람은 누군데?"
"아니 무슨 소리예요? 당신이 편지 쓰겠다고 하니까 주소를 가르쳐 주었지."
"허이고, 당신이 먼저 주소를 보낸 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다 알 거야."
남편 말에 의하면 중매쟁이가 남편 집에 찾아와 '색시가 주소까지 적어주며 편지를 꼭 기다린다고 하니 색시 체면을 봐서라도 남자 쪽에서 편지 한번 해 주는 게 예의 아니겠냐'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 둘은 서로가 '나는 절대로 먼저 편지 해 달라고 말한 적이 없다.'고 우기면서도 25년을 정 좋게 아들, 딸 낳고 잘 살아왔다.
우연한 기회에 중매쟁이에게 사실을 물어 보았더니 자기도 모른다며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둘의 모습이 참 잘 어울리고 좋아 보인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주머니의 중매 솜씨에 감탄했지만 이게 다 인연이란 것이겠지 생각한다. 그렇게 편지는 우리를 맺게 해준 끈이 된 것이다.
요즘도 틈을 내어 두 아이에게 편지를 자주 쓴다. 성년의 날을 맞을 때나, 대학 입학과 졸업 또 사회에 첫발을 내딛던 날도 긴 사연을 적어 어미의 당부와 기쁨의, 축하 글을 주었다. 또 가까운 지인 들에게도 편지를 많이 쓰는 편이다. 꼭 답장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행여나 회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다림을 떨치지 못하고 있을 즈음 집배원 아저씨라도 지나가면 왜 그리 반가운지. 괜히 가슴 설레며 우편함으로 달려가 보지만 편지는 보이지 않고 갖가지 광고물과 공과금 고지서로 가득하다. 세상이 너무 삭막하고 정이 메마른 듯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요새는 너도나도 이동전화를 갖고 다닌다. 젊은이들은 보고 싶으면 길을 가거나 버스 속에서도 남을 의식하지 않고 조잘대며 사랑의 대화를 나눈다. 과연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진실한 사랑의 밀어를 주고받을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 세대는 달랐다. 창가에 촛불을 밝히고 따뜻한 커피 한잔 마시며 그리운 이에게 밤새워 정성껏 쓴 편지 속에 말린 꽃잎이나 풀잎까지 예쁘게 붙여 보냈다. 아름다운 시 몇 줄까지 곁들여 사랑의 편지를 쓰곤 했는데. 답장을 기다리며 지내는 며칠 동안 무엇보다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는 지금은 이 모두가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어쩌면 현대인들은 너무도 맑고, 순수하고, 소중한 많은 것을 잃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앞으로도 더 많은 이들에게 열심히 편지를 쓰며 중년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련다. 내 편지를 받는 이들이 비록 답장은 보내오지 않더라도 고이 간직했다가 훗날 다시 꺼내보게 되기를 기대한다.
세월이 흐르면 그 두께만큼 내 편지 상자도 더 많은 추억들을 담고 있겠지. 살다가 문득문득 견디기 힘들 때, 바람이 불어와 몹시 쓸쓸해질 때, 그 편지들을 다시 꺼내 읽는 것도 내겐 더 없이 소중한 행복이다. (2000년 제주수필 문학상 당선작)
具 貴 男
1952년 충남부여 출생
현대수필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제주문인협회 회원. 제주여류수필협회 회원.
홈페이지
http://myhome.naver.com/guinam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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