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만 쓸 줄 아는 제자 / 정영숙
나는 아파트에 비치되어 있는 편지함을 보는 것이 매일 습관이 되어있다. 보고 싶은 사람과 재소자의 편지, 음악회 프로그램 ,미술전시 안내장, 결혼 청첩장, 각종 행사의 알림 통지서, 알지 못한 회사의 홍보 유인물 기타 편지함이 쉴 날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만약 편지함이 비어 있는 날이 있을 때는 어쩐지 나의 존재가 세월에 밀려 떠내려 가는듯한 서글픔이 와서, 몇 글자 시를 끄적끄적 하다가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편지는 쓰기는 싫어도 받는 것은 즐겁다. 나처럼 받기 좋아하고 쓰기 싫어하는 염체 없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편지를 받고 답장 쓰기가 싫어 몇 일 망설이다가 전화로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 받는 쪽에서 하는 말의 대부분이 글재주는 있으면서 편지 쓰는 재주는 없느냐는 농담을 한다.
그런데 꼭 답장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목회자 사모인 제자다. 내가 아무리 전화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해도 안 가르쳐 주고 1년에 몇 번씩 꼭 편지를 한다.
그 제자는 H 목사님의 딸인데, 다른 음악 학원에서 피아노를 배우다 대학에 진학하기 위하여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나에게 왔다. 성격이 활발하고 피아노를 열심히 연습하는 노력파 학생이며, 렛슨 할 때는 눈을 반짝이고 웃으며 듣는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다른 학생에 비하여 제대로 렛슨비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을 어느 교사가 렛슨비 많고 적음을 가지고 차별을 하겠는가. 3년 후 그는 음악대학에 진학 하였고 대학에서도 장학금을 계속 받았다. 물론 피아노 출장 렛슨도 하면서 부모의 도움 없이 대학원도 졸업 하였으며 대학에 출강도 하고 있다.
대학 1학년 때부터 나에게 편지를 하였는데 그 내용이 성격같이 재미있었으며 고생을 기쁨으로 극복하는 긍정적인 삶을 보여주어 우리 가족들에게 읽어주기도 하였다. 내가 큰 소리로 읽어주면 가족들은 자기들 일인 것 같이 좋아 했다.
요즘 같이 전화나 이-메일(E-mail)로 간단히 연락을 하는 때에 나이가 많은 사람도 아니고 젊은 사람이 깨알 같은 글씨로 편지지 서너 장을 꽉 채워 써서 보낸다. 제자의 편지 분량에 비해 나는 너무 간단히 답장을 한다. 그런대도 섭섭함을 느끼지 못 했는지 한결 같이 신상(身上)에 일어나는 일들을 흥미 진진 하게 보고하며, 꼭 끝줄에 가서는 " 선생님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제가 학생을 가르쳐 보니까 선생님 생각이 자꾸만 납니다 " 라고 하였다.
나는 흔히들 제자들이 인사로 하는 말인 줄 알고 읽었는데 번번히 그렇게 써니까 부담을 느꼈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그 말은 쓰지 말도록 부탁을 했더니, 자기는 물질로는 못 갚아도 마음으로나마 잊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쓰니까 조금도 부담을 느끼지 마시라고 했다. 가끔 사진에 설명을 써서 보내기도 하였다. 몇일 전 사진 정리를 하면서 보니까 11장이나 되었다.
어느 날 편지 속에 한 청년의 사진이 들어 있었는데 그 청년이 교제중인 결혼 상대라고 하였다. 지금 신학대학원 학생이며 목회자 후보라고 했다. 나는 편지를 받고 조금 실망하여 답장을 이렇게 썼다. " 나는 네가 좀 부유하고 마음 적으로 고생을 적게 하는 남편을 선택하여 주기를 바랐는데 목회자 후보라니? 아버지 목사님도 목회 하시면서 어려움도 많았고 또 지금은 중풍으로 누워 계신지 몇 년 되지 않느냐. 너도 자라면서 고생도 많이 했는데 이제는 돈 많은 남편을 만나 친정도 도우고 네 음악의 길도 열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라고-.
편지가 왔다. 자기도 한 때는 그런 생각을 하였지만, 이 길이 하나님이 선택하여 주신 길이라 믿고 고생이 되더라도 고생을 감사로 삼고 살 생각을 하고 있으며, 비록 가난한 목사의 딸로 태어 낳지만 아버지의 삶에서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길인지 깨달았다고 헸다. 그리고 아버지를 존경 한다고 썼다.
나는 목회자의 딸들이 왜 어려운 길을 알면서 또 그 길로 가는 것인지를 알았다. 내가 아는 어느 선교사의 부인도 목사의 딸인데 미개국(未開國)의 선교사로 간 남편을 따라 가서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살고 있다. 그 사모도 내 제자와 같은 믿음과 천국의 부요함을 갖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부모 형제도 못 말리는 것이 결혼인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제자의 결혼을 반대하겠는가. 되려 육신적인 생각으로 편지 쓴 것만 해도 부끄러울 뿐이다.
두어 달 후 제자는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전도사인 남편은 심심산골 교회로 부임 했다. 교인5명, 재래식 화장실, 사람 만나기는 가뭄에 콩 나듯 하며, 기타 불편한 생활은 글로 다 쓸 수 없는 환경이라고 했다. 하지만 시골 생활도 선생님이 생각 하시는 것 보다 재미있는 데도 있으니 조금도 걱정 마시라는 편지가 왔다. 뿐만 아니라 시골 길을 한참 걸어 나와 버스를 두 번 바꾸어 타면서도 일주일에 하루 대학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보람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 이라고 하며, 즐거움을 느끼는 모습을 그림을 그려가며 썼다.
문장력도 생기가 나고 매력이 있어서 받는 즉시로 봉투를 뜯어 읽어보고 답장을 보내는 세월의 틈새로, 제자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남편은 교인 200명 정도의 교회 부목사가 되었다.
한동안 편지가 오지 않아 궁굼증이 생겼는데 편지가 왔다. 답장을 하면서, 이제 10년이 넘도록 편지 한다고 서로 불편한 적도 많았으니 네 남편 교회의 이름과 전화번호나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전화가 왔다. 나는 제자에게 내 나쁜 전통을 깨고 오랫동안 답장을 받은 사람은 너 뿐이니 영광인줄 알아라고 했더니, 깔깔 웃으며" 선생님 전화번호는 없는 걸로 해주세요. 또 편지 하겠습니다" 하고는 수화기를 놓았다.
6개월 후 편지가 왔다. 몇 년을 중풍으로 누워 계셨던 아버지가 천국 가셨다는 내용이다. 나는 다음 날 즉시로 간단히 쓴 위로의 편지와 책 한권을 사서 등기로 보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사하고 없다면서 되 돌아 왔다. 편지로만 연락하고 전화번호도 모르고 남편교회 이름도 모르니 편지 오기만 기다릴 수밖에 없다. 아? 그때 꼭 친정 전화번호나 저희 교회 이름과 집 전화를 물어 볼 것을! 하는 후회가 벼라 별 상상의 원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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