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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어디로 가는가? / 임선희
학생시절，아침마다 집을 나설 때의 인사말은 『다녀오겠습니다』였다．직장인이 된 다음에도 변함은 없었다． 구미사회에는 다녀오겠다는 인사말이 없다．사전을 펴 봐도 영어는 물론，독일어나 프랑스어에서 똑같은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미국에서는 외출할 때 『바이』，귀가해서는 『하이』로 통한다．『다녀오겠습니다』 혹은 『다녀왔습니다』는 한국인의 가족관과 가정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외국영화를 보면， 출근하는 남편을 아내가 포옹으로 전송한다． 우리나라에선 결혼초기라면 몰라도 아이가 태어나고，가정다움이 형성되면서부터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다．포옹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인사법이다．반면에 다녀오겠다고 말할 때，그것은 「집」 전체를 향한 의식（儀式）이라 해야겠다.
서양사람은 ５시간의 나들이를 앞두고도 『굿바이』 하며 작별하지만，우리는 ５년간의 해외유학을 떠날 때도 안녕히 계시라고는 말하지 않는다．여전히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비행기에 오른다.
하루든 일생이든，끝내는 돌아오고야 마는 곳이 우리의 집임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사정은 바뀌었다．집은 반드시 돌아가고 싶은 곳이 아니다． 비디오방，ＰＣ방，노래방，운동경기장，명칭도 어여쁜 각종 술집…가고 싶은 곳이 좀 많은가．집까지 도달하려면 출렁이는 유혹의 바다를 헤엄쳐야만 한다．
허위단심 돌아와도 집은 항용 비어 있다．주부는 왠지 집을 지키기에는 너무나 바쁘다．부모의 이혼，별거，가출은 늘어만 간다．식구가 밥상 앞에 함께 앉지를 못한다．가족은 이미 한솥밥을 먹는 관계가 아니다．혈연이라는 이름의 이방인이 한 지붕 밑에서 저마다의 고독을 쌓아가는 것이 현대의 가정이다．문명은 위험한 것，문명도가 높을수록 위험도도 높을 수밖에 없다．문명은 지진처럼 가정을 흔들고 부수고 한다．그렇다고 인류가 애써 걸어온 길을 되짚어서 원시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의지할 것은 참된 지혜뿐이 아니겠는가．이렇게 해라，저렇게 하지 말아라 등 훌륭한 이론은 많다．
그들 전문가의 가정이 이론대로 건강하고 화목한가에는 의심이 간다．남을 걱정할 일이 아니다．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슬기롭게 대처해야 한다．비관스럽게도 너나없이 현명한 사람보다는 미련한 사람이 훨씬 많은 것이 세상이다．
지혜롭지 못한 세파에 떠밀려 가정은 어디로 가는가．그러나 끝이 안 보이는 것은 아니다．우리는 아직도 다녀오겠다고 굳게 약속하면서 매일 집을 나선다．
결혼해서 분가한 아들은 명절이면 필사적으로 귀성길에 오른다．타국에서 눈감으면 뼈라도 고향땅에 묻히기를 소원하지 않는가．평생을 떠돌던 탕아도 내세엔 부모를 찾아가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다．그런 한국인이 있기에，지구상에는 최후까지 가정이 남을 것이다 하고 상상해 본다.
[출처] 국민일보 990519 (임선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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