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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대화
鄭 木 日
종을 한 번씩 울려서 마음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속세에 찌든 내가 가엾어서 베푼 소리의 자비였을까. 이 세상에서 내가 받아본 가장 귀중한 대접이었다. 종소리로 닿아오는 은근하고 황홀한 마음 선물, 종을 한 번 울리게 해주신 감격은 잊히지 않고 마음속에서 낭랑히 울리고 있다.
지리산 벽송사 ‘서암정사(瑞巖精舍)’는 처음 가보는 암자였다. 화가 이목일의 초청으로 마침 한국에 온 미주 세계일보 컬럼리스트 김옥기 님과 함께 갔다.
암자는 독특했다. ‘법당’ ‘비로전’ ‘극락전‘이 전통 불교 양식이 아니었다. 동굴 속에 불상을 안치하고 화강암 벽면은 불상을 위시하여 무수한 불보살을 양각하여 놓았다. 실크로드의 한 거점 도시 둔황의 근교에 있는 세계 최대 불교미술 유적지인 막고굴이 떠올랐다. 막고굴은 사막의 사암 언덕에 동굴을 파서 그 속에 불상을 안치하고 벽화를 그린 동굴이 1천여 개나 조성된 곳이다.
한 미술가가 동굴 하나를 파서 그 속에서 들어간다는 것은 생애의 마지막 작업을 의미한다. 어두컴컴한 굴속에다 부처상을 안치하고 불화를 그린다는 것은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가능하지 않다. 그들은 자신이 판 굴이 예배 처이자 뼈를 묻을 마지막 공간임을 알고 있었다. 인간이 신의 형상인 부처를 형상화하려면, 스스로 깨달음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오랜 참선과 기도 속에 깨달음의 눈을 떠야만 비로소 부처의 미소를 그려낼 수 있다. 어둠 속 동굴에서 조각 작업과 불화를 그리려면, 청동 거울을 반사시켜 빛을 끌어들여 벽면을 비춘 다음에야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동굴 속에는 기름불로 안을 밝혀 놓았지만, 미술작업은 햇빛을 이용한다. 이 작업은 암흑천지의 동굴 속을 광명으로 채우는 일이었다. 속세를 극락으로 바꾸는 일이기도 했다. 그 굴이야말로 미술가들이 일생을 통해 찾아왔던 궁극의 지점이었고, 깨달음의 공간임을 절감했다.
서암정사 법당과 다른 동굴들을 보고나서 누가 이 동굴을 조성한 것인지 궁금하였다. 그는 틀림없이 막고굴을 조성한 미술가들처럼 깨달음의 공간을 지리산에 조성해 놓고자 한 것이 확실했다. 그분을 만나고 싶었다.
동굴에서 나와 조금 걸으니 정자형(亭子型)의 종각이 있었다. 옆에 노스님이 계셨는데, 이목일이 나를 소개했다. 노스님이 반가워하면서 종각 위로 오르자고 안내했다. 서암정사를 조성하신 원응(元應) 큰스님이셨다. 우리는 종각으로 올라갔다.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 지리산 깊숙이 자리한 서암정사, 우주의 한 점일 듯한 종각에 올랐다. 첩첩한 산 능선들이 기러기 나래 짓으로 영원 속으로 훨훨 정답게 날아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종소리 한 번 들어보시려오?”
노스님 말씀이 천만 뜻밖이었다. 절에서 종소리를 들을 때는 새벽과 저녁 예불이 있을 적뿐이다. 나는 놀라서 합장하며 절을 드렸다. 차 한 잔 대접이 없었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종소리나 한 번 들어보라는 마음이신 듯하다.
“덩-”
종소리 울려 나가고 여린 음파는 길게 이어져 영혼 속에 스며들기라도 하듯 미세한 맥놀이 음으로 떨려왔다. 기가 막히는 게 아니라, 기가 활짝 열려왔다. 종소리가 그친 것인가, 다시 들려올 것인가, 허공에다 귀를 대고 있었다. 종소리 미세음(微細音)조차 그친 상태인 데도 내 마음속엔 울리고 있었다.
종각은 아직 단청도 입히지 않은 상태였다. 3년 동안 기다려 목재가 마른 다음에야 단청을 올린다고 했다. 노스님이 나를 보더니, 불쑥 말씀하셨다.
“종 한 번 쳐보시려오?”
너무 놀라고 황송해서 대들보만한 나무를 종에다 갖다대는 시늉으로 울려 보았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종 울림이 아니었을까. 눈을 감았다. 처음으로 사찰의 종을 단 한 번, 쳐보는 것이었다. 종소리를 따라 마음으로 기원을 보내고 있었다.
종소리, 보낼 테니 들어보소서. 저승에 계신 어머니! 그리운 이들이여, 숙부쟁이꽃, 며느리밥풀꽃 등 풀꽃들 들어보소서.
지리산 계곡들이 힘을 합해서 울려주소서. 지리산 만년 명상을 풀어서 울려 주소서. 바람이여, 소리 파문을 길게 이어주소서.
이 종소리 듣는 모든 것들과 듣지 못한 모든 것들에게 평화와 자비가 넘치게 하소서.
소리 광명의 자비를 베풀어 주신 노스님의 마음을 알고서, 머리 숙여 합장 인사를 드리는 동안 은은한 종소리가 강물처럼 가슴 깊숙이 흘러왔다.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세계에서 종소리가 제일이라는 에밀레종의 종명(鍾銘)에는 ‘일승원음(一乘(圓音)’이란 말이 새겨져 있다. 종소리를 듣는 모든 사람들이 단숨에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내가 울린 작은 종소리가 길게 이어진 것은 지리산 계곡이 깊어서 일 것이고, 지리산 침묵이 깊어서 일 것이다. 지리산의 소나무, 대나무 등 뭇나무들과 풀들이 귀를 열고 듣고 있어서 일 것이다. 내가 여기에 오면서 거친 오도령, 백무동계곡, 칠선계곡들이 듣고 있어서 일 것이다.
산중 해는 일찍 지고, 어둠도 먼저 찾아옴을 알고는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그 일이 어제 일인 양 가깝게 느껴지지만, 세월은 비켜 지나가고 있다. 그러나 종소리만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마음속에 ‘덩-’ 하고 그리움의 여음이 들려오고, 소리 물결이 흘러와 마음을 채워준다.
종소리엔 지리산 만년 달빛과 명상이 어리고, 풀꽃 향기와 계곡의 물소리가 잠겨 있다. 지리산 벽송사 서원암 노스님의 마음이 담겨 있다.
일생에 한 번 울린 산중 종소리 대화였다. 지리산 한가운데서 울린 침묵의 소리였다. 만년 명상의 미소였다. 마음 한가운데 피어난 소리 꽃이었다. 그 때 한 번 울린 종소리는 그냥 사라져버린 게 아닌 모양이다. 잊히지 않고 깊고 맑은 종소리는 낭랑히 울려 내 마음에 지리산 구철초꽃향기를 실어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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