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
鄭 木 日
우리나라의 여름은 유난히 길고 무덥다.
땡볕이 쏟아지는 한낮에는 만물이 지쳐 기진맥진하고 만다. 감히 작열하는 해를 바로 쳐다볼 수 없고 몸을 숨기기 바쁘다. 여름의 해는 가히 폭군이어서 아무도 저항하지 못한다. 간신히 몸을 추스르며 노염(老炎)이 물러가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이런 여름철에 눈을 황홀하게 해주는 꽃이 있다. 찌는 듯 하다 날씨,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때에 눈앞에 우아한 모시옷 차림새의 귀공자가 보란 듯이 웃고 있다. 그 꽃이 바로 무궁화이다.
불볕 속에 홀로 온화하고 평화스런 얼굴로 웃고 있다니 뜻밖의 경이요, 신선한 충격이랄 수밖에 없다.
35가 넘는 이상 기온이 20여 일이나 계속되던 어느 날, 길에서 무심코 무궁화를 만나는 기쁨을 맛보았다. 길가의 무궁화는 백단심(白丹心)과 홍단심(紅丹心) 두 종(種)이었다. 흰 꽃은 때 묻지 않은 백자처럼 보였고, 보라꽃은 청자를 닮은 듯했다. 꽃을 들여다보면 은은한 색깔에 황금빛 꽃술이 돋아 있어 눈을 황홀하게 했다. 안쪽엔 불그스름한 빛깔이 감돌아 변하지 않는 마음을 안으로 품고 있다. 이를 단심(丹心)이라 한다던가.
무궁화는 꽃잎 속에 황금빛 촛불인 양 굵은 꽃술을 지녔다. 꽃술은 섬세하고 정교한 영락을 붙여놓은 듯 번쩍거린다. 다른 꽃들은 저마다 아름다운 빛깔을 뽐내거나 단색의 단조로운 모습을 보일 뿐이지만, 무궁화만은 꽃잎 바깥쪽과 안쪽, 꽃술의 세 가지 빛깔이 한데 어울려 종소리처럼 번져가는 듯하다.
동해의 해돋이 광경이 문득 떠오른다. 어둠 속의 바다가 여명으로 투명해지면서 붉고 해맑은 해가 솟아오르는 모습과 표정, 그 순간의 황홀, 신비와 광명을 맞아들여 피어난 것이 무궁화가 아닐까 싶다.
무궁화는 빛의 꽃이다.
새벽 서기를 받으며 아무도 모르게 피어난다. 백단심은 목련과 백장미를 합해 놓은 듯 순결과 결백의 표정 속에, 부드러움과 평화가 넘치고 안으로 피처럼 붉은 마음을 적셔 놓아놓았다.
홍단심은 신비스런 보랏빛 속에 꽃술 주변에 타는 듯 붉은 마음을 흠씬 물들여 놓았다. 무궁화의 고아하고 정결한 맵시, 한없이 부드러우나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기개. 은은한 색조에 고결한 기풍을 띤 모습은 무더운 여름날을 맑고 산뜻하게 만들어 준다.
무궁화는 1천4백도의 불길에서 생명을 얻어 탄생하는 도자기처럼 불볕 속에서 아리따운 자태가 두드러지는 꽃이다.
여름 꽃인 나팔꽃은 불과 몇 시간 피었다가 해가 뜨면 시들고 말지만, 무궁화는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하루 내내 그 자태를 자랑한다. 다섯 장의 꽃잎은 비단처럼 부드러우나 푹푹 찌는 땡볕에도 자태를 흩트리지 않는다. 뭇 꽃들이 열흘쯤 피었다 지지만 무궁화는 여름 내내 꽃송이를 연이어 피워 초가을까지 1백여 일 동안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눈보라 속에 가장 먼저 피는 매화나 무서리 속에 가장 늦게 피는 국화에게서 군자의 절의와 기풍이 느껴진다면, 지글지글 타는 폭염을 이겨내고 1백여 일 동안 피는 무궁화에게서 우리는 불굴의 정신과 기개, 고결한 기품을 엿보게 한다.
불볕더위를 혼자 버티고 견뎌 오히려 무색하게 만들고 만물들에게 생기를 되살려 주는 꽃, 여름 한낮을 경이와 우아함으로 가득 채워주는 무궁화! 뭇 꽃들이 피어있을 적엔 찬탄의 대상이지만 땅에 떨어진 모습만은 가련하다 못해 추한 모습마저 보인다. 목련과 장미도 지고 말면 시커멓게 변색되고 마치 늙어빠진 작부처럼 볼품이 없어진다. 무궁화만은 땅에 떨어질 때 우신처럼 자신의 몸을 단정하게 닫아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여름 불볕에도 쉴 새 없이 피어나는 무궁화가 있는 한 우리 겨레는 어떤 어려움도 견뎌서 그 아름다움을 자자손손 꽃피워 가리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폭염 속에 환한 모습으로 핀 무궁화는 순교자처럼 숭고하고 거룩한 정신과 자세를 일깨워준다. 여느 꽃들에게서 느끼는 아름다움과는 사뭇 다른 결백하고 의연한 미감(美感)과 신비를 전해준다.
우리는 무궁화에게서 담금질하여 더욱 단단해진 강철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그 불변의 자태와 정신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민중적인 공감대 속에 무궁화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열렬한 애호를 받아 겨레의 마음
속에 피어나고 있다. 영원히 겨레의 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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