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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꽃은 핀다.
오 승 희
세상이야 어지럽거나 말거나 바람은 가고 오고 꽃들은 피고 진다. 유난히 춥고 눈도 지겹게 퍼붓던 겨울이 주춤주춤 자리를 비키고 미쳐 못 떠난 찬바람이 옷깃 속으로 숨어든다. 못 간다고 앙탈을 부리는 추위를 단숨에 몰아내려는 것인가. 봄 나무들은 잎도 나오기 전 서둘러 꽃부터 피운다. 날로 두터워지는 햇빛의 비호를 받으며 개나리가, 진달래가, 매화와 목련이 피더니 벚꽃이 수선을 떤다. 이 화려한 잔치에 나는 구경꾼 노릇 한번 제대로 못 했는데 어느 새 향연은 끝나고 꽃들을 털어낸 나무들이 새 살림을 시작한다.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나는 오랜만에 허리를 펴고 마당에 나와 크게 숨을 들여 마신다. 달달한 봄의 향기가 온 몸을 휘감는다.
새로운 땅에 정 붙이기가 그렇게 힘든 것인가. 3년 전 웃집 할머니께서 “큰 화분은 이제 힘에 부친다” 며 작약뿌리 몇 개와 겹 매화 한 구루를 주셔서 마당 한편에 심었다. 그동안은 봉오리는 맺어도 꽃을 피우지 못하고 떨어져 버리더니 금년에야 작약은 한 송이를 매화는 대여섯 송이가 탐스럽게 피어 나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봄볕은 더없이 따사롭고 하늘은 가을하늘 못지않게 청명하다. 이 달콤하고 훈훈한 봄 향기 속에서 꽃들이 나에게 가만히 일러주던 말들을 생각해본다.
내가 첫아이를 낳았을 무렵 세상을 일찍 떠나버린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이 사무칠 때 담장너머 앞집 마당에 우아하고 의젓하게 피어나 조용히 웃던 하얀 목련은 엄마 같아 보였다. 1967년 임신 말기에 갑작스런 하혈로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었다. 엉겁결에 죽음의 늪을 징검다리건너 듯 넘어 망연히 서있는 나에게 병원 울타리를 따라 다부지게 피었던 노란 개나리는 세상을 다시 보게 된 것을 축하 한다며 용기를 내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때 개나리의 노란 빛깔은 난생 처음 보는 것 같은 빛깔이었으며 기쁨이기보다 충격이었다. 몇 해 전 벌어진 일들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접시 물에라도 코를 박는 것이 났겠다고 허둥대는 나에게 여의도 윤중로의 벚꽃이 활짝 웃으며 다가와 “웃어요, 웃어 봐요.” 했다.
돌 틈에 간신히 뿌리를 박고도 반짝 빛나던 민들레, 한겨울 컴컴한 창고 한 귀퉁이에 벼려진 화분 속에서 추위와 목마름을 죽기를 한 하고 버티던 군자란, 어쩌다가 커다란 대추나무 옆에 심겨져 한 쪽으로만 자라면서도 초여름 뙤약볕에 빨간 열매를 조랑조랑 매달던 허리 휜 앵두나무, 이들은 세상을 쫓기듯 살아가는 나에게 삶이란 그저 그런 거라고 속삭이듯 나를 달랜다.
때 되면 의례히 피는 꽃이라지만 저들이라고 세상살이가 수월하기만할까.
엄동설한과 삭풍을 견디어야하고 계절을 잊은 듯 변덕을 부리는 날씨와 탁해진 대기, 땅속을 흐르는 물조차 온갖 독소로 오염돼 옛날 같지 않다고 하지 않는가. 더구나 한참 피었을 때는 모든 찬사를 퍼 붙다가도 시들면 사정없이 돌아서는 인심이 야속하리라. 이러는 나도 매정하기는 마찬가지다. 초라한 뜰에 몇 안 되는 나무와 화분이건만 나 살기 바쁘다고 늘 홀대한다. 올해 같은 가뭄에 물도 잘 챙겨주지 않으며 땅을 돋아주는 일도, 화분에 흙을 갈아주지도 않는다. 영양실조로 비들비들 해져도 모르는 척 상관 않는다.
그런 틈에서도 잘 살아내는 이들은, 대책 없이 비틀거리는 나에게 때로는 엄마요, 스승이며, 친구가 되어준다. 나는 이들에게서 인내를 배우며 세상에 대한 믿음을 키운다.
이제 봄이 가면 작약과 매화가 지고 빨강과 하얀 줄장미가 이어서 피어 날 테고, 찌는 여름이면 탐스런 수국이, 삼복이 지나면 부추를 닮은 실란이 눈 같이 하얀 꽃을 화분 가득이 피워, 더위에 지친 심신을 식혀줄 것이다.
옹기종기 무리지어 피어난 라일락꽃 향기와 오랜만에 듣는 윤형주의 맑은 노래 소리가 화창하고 삽상한 봄 날씨 속에서 공연히 부글부글 끓으려는 내 심사를 지그시 누른다.
2002. 5.
오승희 수필가
사계동인
[에세이스트]로 등단 (등단작- '청파동 202 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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