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dy oncontextmenu="return false" onselectstart="return false" ondragstart="return false">

Home 자작 수필을 올려주세요~
-로그인이 안될 때는 ☞수필넷다음카페별관 수필의 뜰에 올려주시면 적절히 게시물이동을 하겠습니다.
2009. 7. 23, 저작권 강화로 인해, 작가가 직접 등록하거나 등록을 부탇받은 글만 게시합니다. 감사합니다. (☞메인)-


  오승희(2008-11-02 16:44:04, Hit : 1799, Vote : 190
 청파동 202 번지


                   청파동 202 번지
                                                          
                                                     오 승 희

내가 이집에 이사 온 것은 1975년 늦은 가을이었다.
아이들 넷을 데리고 일년에 방을 몇 번씩이나 옮겨야 했던 그 무렵 나는 복덕방 할아버지를 보기만 해도 걸음이 뒤로 걸렸다.
이 주변은 전쟁의 혼란을 틈타 세운 판자 집과 무허가 건물들이 마구잡이로 뒤엉켜 있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청파동 제일 끝 지점이고 효창동, 공덕동, 서계동이 만리시장을 중심으로 잇대어있는 아주 복잡한 곳이다.
목조 건물인 이 집은 상당한 재력이 있던 일본사람이 지은 이른바 적산가옥 이라는 것이다. 집 주인인 할머니는 이집에 가정부로 있다가 해방을 맞아 집을 불하 받았다.  
해방 후 전연 보수를 하지 않아 겉은 허름해 보였으나 뼈대는 단단했다. 나는 할머니에게 미리 부탁해, 그곳에 사는 사람이 이사하기를 일년 넘게 기다렸다가 부엌이 달린 안방으로 들어갔다. 달리 수입이 없던 할머니가 마당 한쪽으로 방을 만들어, 내가 들어갈 무렵에는 여덟 가구가 한 울안에서 살았다. 곧 동네가 개발 바람을 타고 소방도로를 내기위해 마당의 방들은 헐리게 되었다.  덕분에 가구 수가 반으로 줄어 살기가 좀 수월해졌다.
내가 이 동네를 쉽게 떠나지 못했던 것은 큰아들이 심한 지체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좌로는 청파초등학교가 있고 우로는 배문중,고등학교가 있다. 어느 쪽으로도 횡단보도나 찻길을 건너가지 않아도 등, 하교가 가능했다. 그렇다고 전여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장애인’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시절, 더구나 그들에 대한 인식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었던 때였다.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쇠로된 보조 신발을 신고 목발에 의지해 복닥거리는 시장 길을 30여분 넘게 걸어야하는 일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아이가 위험하고 힘들다고 꾀를 부릴 적마다 나는 필요 이상으로 매몰차게 굴었다. 진눈깨비가 퍼 붙던 어느 겨울날에도 징징거리는 아이를 대문 앞에 세웠다. 그리고 나는 책가방을 들고 아이 뒤에 바짝 붙어 섰다. 제 누이들이 뛰어 나오고  웬 극성이냐고 남들이 혀를 클클 찾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것이 아들로서는 자조(自助)의 길이고 나에게는 공조(共助)의 길이라고 생각 했다. 어쨌거나 아들은 12년의 학업을 마쳤다.
나는 큰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이 집에서 살려고 했다. 허지만 현실은 예상이나 계획과는 상관없이 굴러갔다. 예정과는 달리 두 딸과 작은아들이 대학과 군복무까지 마쳤고 딸들이 차례로 시집을 갔어도 나는 이 집을 떠나지 못하고 30년 가까이 살았다.
이사 올 무렵부터 서울은 개발 붐이 일고, 잠실에 아파트단지가 터를 다지기 시작하면서 첫 번째 부동산파동이 소용돌이쳤다. 이곳도 개발이 시작되면서 땅값은 하루가 다르게 뛰었다.
여기저기 아파트가 세워지고 사람 사는 모양새가 달라지면서 집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고 있었다. 집이 가족이 모여 사는 보금자리가 아니라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된 것이다.
사람들은, 특히 여인들은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바람을 일으켰다. 부동산으로 돈을 벌어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는 사람들을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다. 누구는 갑자기 땅부자가 되었고, 누구는 빌딩을 세우고, 그야말로 요지경속이었다.  세상은 급속도로 변하고 있었지만, 아이들 등록금과 오르는 방세 챙기기도 힘들었던 우리내외는 달리는 세상을 쫒아갈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이런 북새통에 전세금을 사글세보증금으로 대체하고 월세로라도 이집에 남을 수 있었던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이곳은 아파트가 세워지기에는 적절치 않아 다가구나 다세대주택으로 개발이 진행되었다. 시유지에다 마구지은 무허가 건물이 많은 이곳에서 반듯한 집 한 채가 될만한 땅을 가진 사람은 드물었다. 두 집 세집 합해서 최소한 30평은 넘어야 한 채를 지을 수 있었다. 정부에서는 소방도로만 내 주고 자체개발을 하라고 했다. 수년 동안 동네는 벌집을 쑤셔 놓은 것 같이 어지러웠다. 그 때 지어진 집들은 말이 개발이지 30여년 지난 지금은 다시 불량주택으로 전락할 판이다.
이집 은 다행히 할머니가 정부로부터 불하를 받았고 도로로 잘려나갔어도 땅이 50여 평쯤 되어서 급하게 짓지 않아도 되었다. 이리떼 같던 건축업자들의 성화와 터가 작았던 동네사람들의 군침에도 이 집은 살아남았다.
이재에는 밝지 못한 남편이지만 그래도 집을 잘 만지는 재주가 있었다. 집주인이 시멘트 한 되 사주지 않아도 불 때는 아궁이에서 연탄아궁이로, 연탄보일러로 다시 기름보일러로, 재래식 부엌과 화장실을 입식주방과 수세식 화장실로 차근차근 바꾸어 놓았다. 삭아서 부슬부슬 떨어지는 벽이나 창문은 헐리는 집에서 문짝과 나무들을 가져다가 식구들이 살기에 불편 없이 고쳐 놓았다. 남의 집을 왜 고치느냐고 빈정대는 동네사람에게 “오래 살면 내 집 될지 알아요” 했지만 실은 이사할 만한 목돈을 마련하지 못해서였다. 우리 내외는 아이들 교육시키는 일에 매달려 부동산파동이나 전세대란 같은 것에는 맞서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집값 또는 전세값은 내가 쫒아 가면 쫒아 간만큼 달아나는 파랑새 같은 것이었다.
그래도 사람 사는 일이 죽으라는 법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집도 아니고,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만한 낡고 허름한 집이었지만 30년 가까이 온갖 풍파와 비바람을 이집에서 피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사는 동안 아이들 교육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으며 식구들 큰 병 앓은 일 없었으니 그 또한 고맙고 감사한 일이 아닌가. 내 힘으로는 도무지 감당 할 수 없는 위기 때마다 우리 식구들을 돌보신 보이지 않는 커다란 손이 있었음을 실감한다.
그간 할머니는 84세로 세상을 떠나셨고 하나 뿐인 딸마저 3년 후 미국에서 병사했다. 졸지에 상속자가 된 할머니 사위한테서 집을 인수 하라는 연락이 왔다. 외환위기사태가 벌어진 때여서 세상이 쑥밭이라는 핑계로 한해 두해 미루다가, 2002년 큰딸아이의 도움과 은행융자를 합해 작은아들 이름으로 구입하고 2003년 다세대주택으로 신축을 했다.   그 동네에서는 마지막으로 지어진 집이다.
그러나 나는 그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여섯 가구 전부를 전세로 내어주고 그 돈으로 건축비와 우선 은행융자부터 갚아야했다. 5개월의 공사기간 중에 정책적으로 주택담보 비율이 40%이하로 낮추어 졌다는 것이다
어찌 하겠는가. 내 복이 거기까지려니 할 수밖에. 나는 작은딸이 쓰던 임대아파트로 물러나 앉았다.
내가 다시 그 집에 들어가 살 수 있으려는지 는 아직 알 수없는 일이다. 종잡을 수없는 부동산정책과 전세시장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그 집을 팔아 버리라고 성화다. 수익성은 고사하고 잘못하면 애물단지가 될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내 생각은 다르다. 왜냐하면 그 집은 세상의 상식과 계산을 뛰어 넘은 집이다.  또 하나 나에게 집은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아니라 가족의 생활과 안위를 지켜주는 대들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용산구 청파동 202의 11번지, 실향민인 남편의 호적이 있는 곳, 이곳에 나와 남편과 4남매의 역사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울고 웃고 다짐하고 맹세하고 모든 인생사를 치렀다. 30년의 세월이라고 하지만, 심리적으로는 그보다 훨씬 긴 나의 일생이 서려 있다.
햇볕 바른 어느 날 마루 끝에 앉아서 수틀을 앞에 놓고 한땀 한땀 수를 놓는다. 발치에서는 8년을 함께 살아 온 발발이 ‘이쁜이’가 땅에 코를 박고 낮잠을 잔다.
마루며 마당은 흔적 없이 분해 되고 이쁜이도 행방이 묘연해진지 3년이 지났건만 그 집에 맺힌 추억은 날로 선명하다. 고생이 많았기 때문에 기억도 그만큼 소중한 것일까. 고통스러웠던 기억 하나하나가 이제는 나의 삶을 역어주는 튼튼한 밧줄로 조차 여겨진다.
전란과 혼동 격동과 발전 그 모든 것을 격어 온 세월이 회상하면 숫한 굽이굽이를 용케도 넘어 왔다는 감회가 인다. 그런데도 옛집을 생각하면 항용 아련하고 잔잔하고 그윽한 모습으로 떠오르는 것은 웬일일까. 꿈처럼 환상처럼 아른거리는 그곳의 관경은 지금의 4층 주택이 되기 이전의 어둑한 방들과 마루, 허름한 담과 조붓한 마당, 이집의 상징이던 커다란 대추나무와, 5월이면 집과는 어울리지도 않게 라일락과 새빨간 줄장미가 골목을 장식하던 모습이다.
작은 행복을 발견 하는 것, 그것이 인생의 모험이며 도전이라는 내 나름의 진실을 청파동 202번지가 가르쳐 주었다.
지금 나에게 소원이 있다면 초로에 든 남편과 나의 자투리인생과 생활능력이 없는 큰아들이 이집에 의지해 살아 갈 수 있기를 바란다.  
                                                          
                                                 2004. 9. 23.


오승희 수필가
사계동인
[에세이스트]로 등단 (등단작- '청파동 202 번지')





sysop (2008-11-03 22:51:14)  
수놓는 여인, 오승희 수필가님~^^ 에세이스트에서 감명 깊게 읽었던 귀한 작품 감사합니다. 항상 건필하시고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용산구 청파동 202의 11번지, 실향민인 남편의 호적이 있는 곳, 이곳에 나와 남편과 4남매의 역사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울고 웃고 다짐하고 맹세하고 모든 인생사를 치렀다. 30년의 세월이라고 하지만, 심리적으로는 그보다 훨씬 긴 나의 일생이 서려 있다.
햇볕 바른 어느 날 마루 끝에 앉아서 수틀을 앞에 놓고 한땀 한땀 수를 놓는다. 발치에서는 8년을 함께 살아 온 발발이 ‘이쁜이’가 땅에 코를 박고 낮잠을 잔다. ----(본문에서)---------'


봄이 오면 꽃은 핀다.
都성의 기원과 유래 [2]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zero
좋은 작품을 올려주신 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모든 게시물의 저작권은 해당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글 등록이 안되실 때는, ☞수필넷다음카페별관 수필의 뜰로올려주시면 적절히 게시물이동을 하겠습니다.
"★작가별 수필 검색~ www.supil.net 수필넷 [ 에세이 아카데미아 ]방문 환영~ Thanks for visiting~! Enjoy...Thanks!"cli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