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밭
안옥수
아침 출근길에 런던의 지하철 세 곳과 시내버스인 이층 버스가 한 시간 내에 연속적으로 폭발하여 사상자가 700여명으로 추정된다는 뉴스다. 마침, 전 날, 런던은 차기 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되어 기쁨에 들떠있었고. 스코트랜드에는 세계 G 8 정상들이 회의 개최에 맞추어 모여 있었다고 한다. 스코트랜드에서 폭발 사고를 보고 받은 영국의 수상은 즉각 테러라고 단정했다. 테러...
9ㆍ11 뉴욕 금늉센터 피격 이후, 미국의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9ㆍ11 테러의 배후로 지목한 오사마 빈 라덴의 체포에 동의하지 않은 아프가니스탄 정권을 무력으로 전복시켰다. 이어서 테러세력의 지원국가로 지목한 이라크가 위험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첩보에 따라 무력 작전을 하고 있다. 이라크 시민의 자유와 그리고 세계의 평화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두 전쟁 모두 영국은 악을 구축한다는 미국과 뜻을 같이하고 연합군으로 참전하고 있다. 그러나 9ㆍ11 이후 세계 각국에서 일어난 테러의 회수는 이전보다 더 늘어났다.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일어난 대형 폭발사건, 스페인, 마드리드의 아침 출근길에서 190여명의 사상자를 낸 기차 폭발사건 등, 줄을 이었다. 오늘은 런던이란다. 9ㆍ11 이후, 5년 동안 테러 경계령이 지속되고 있는 런던에서. 뉴스를 듣던 나의 머리에는 한 달 전 아들네 집 정원에서 풀을 뽑던 잔디밭이 떠올랐다.
하루 밤을 지나고 이른 새벽 이층 창문을 열었다. 공기가 시원하다. 힘껏 숨을 들이켰다. 주택가인데도 마치 강원도 산골에서 마시던 공기 맛이다. 멀리서 멧새소리가 들린다. 새소리도 시간차에 따라 다른 소리다. 새들이 일어나는 시간도 종류에 따라 다른가보다. 햇살은 퍼지지 않았지만 밖이 부옇게 변하고 시야에 사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원에 있는 뚱뚱보 사철나무 가지가 흔들리더니 한국의 참새 비슷한 작은 새가 푸르르 나라서 정원에 있는 키가 낮은 장미 나무에 앉았다. 나의 눈도 새의 움직임에 따라 장미나무가 자리한 잔디밭으로 쏠렸다. 분명 전날 공항에서 들어올 때 본 정원의 잔디밭은 파랗고 아름다웠다. 그런데 하루 밤이 지나고 아침 일찍 이층 창문에서 내려다본 잔디밭은 잔디만 곱게 자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녹색 융단을 편 듯한 잔디밭 군데군데 샛노란 웃음을 띤 얼굴을 잔디 사이에서 쳐들고 여명을 맞이하는 민들레, 녹색 바탕에 동글동글한 이파리를 줄지어 수놓은 듯한 은은하면서도 눈에 띠는 뱀 딸기 넝쿨, 파란 이파리 모음에서 복슬복슬한 하얀 송이를 내밀고 있는 크로바. 잔디밭은 잔디만 있어야 한다는 원칙만 없다면 그 광경도 아름다움에 틀림없다.
햇살이 퍼질 무렵, 마을길을 따라 산책을 나섰다. 집집마다 푸른 잔디, 네모나게 또는 둥글게 전지 한 나무들, 제 맘껏 훌쩍 자란 나무, 건물 둘레에는 여러 가지 화초가 꽃을 피우고 있다. 큰 나무와 화초 밑에는 집주인의 취향에 따라 검은 혹은 빨간 멀치(mulch)가 깔려있다. 나는 아들에게 저 집들의 잔디밭은 어떻게 잔디만 저렇게 곱게 자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잔디 깎은 지가 얼마 안되었거나 제초제를 뿌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 이것 보세요. 주의(caution)라는 팻말이 꽂혀있지요. 오늘 아침 제초제를 뿌렸으니 가까이 오지 말라는 뜻이에요.”한다. 그의 집은 둘째 아이가 너무 어려서 가능하면 집 둘레에 제초제를 뿌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날 퇴근 후, 집을 사방으로 둘러쌓고 있는 넓은 잔디밭을 땀을 뻘뻘 흘려가며 깎았다. 다른 집과 같이 파란 잔디밭이 되었다.
사흘 후 내 침실에서 내려다보니 또 노란 민들레 꽃, 뱀 딸기 이파리, 하얀 꽃송이를 내밀고 있는 크로바가 눈에 띠었다. 나는 잔디밭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노란 꽃이 피어있는 민들레 포기를 잡고 힘껏 잡아 당겼다. 이파리만 한 주먹 쥐고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언제 내려왔는지 아들이 내미는 것은 기다란 민들레 뽑는 기구였다. 뽑아보니 뿌리가 한 뼘은 된다. 그다움은 뱀 딸기 잎으로 갔다. 이파리에 손을 대니 이파리만 똑 떨어지고 만다. 이파리를 쥔 왼 손에서 힘을 빼고 오른 손으로 이파리가 붙어있는 줄기를 더듬어 들어갔다. 잔디와 마찬가지로 넝쿨의 마디마다 잎이 솟고 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힘을 적당히 조절하면서 정성껏 뽑아 올라갔더니 그 길이가 열 뼘도 더 되는 것이다. 줄기가 강하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뿌리를 찾을 수가 있어서 재미있었다. 따가운 햇살이 퍼지는 것도 모르고 옆에 있는 크로바에 다가갔다. 크로바의 줄기는 잔디나 뱀 딸기 넝쿨과 달리 습기가 많아 여인의 살결처럼 보드랍고 연하다. 뱀 딸기 넝쿨을 뽑듯이 왼 손에 크로바 이파리를 쥐고 오른 손으로 줄기를 더듬어 들어가는 데 워낙 연하기 때문에 잎은 떨어지고 그 옆에 있는 잔디뿌리를 잡아 다리는 실수를 했다. 옆에서 같이 풀을 뽑던 아들이 “남의 다리 긁지 마세요.”한다. 크로바도 넝쿨을 뻗어가면서 마디마다 뿌리를 내리고 잎을 피우는 식물인데 그 연한 줄기는 모두 잔디넝쿨 밑으로 뻗고 있어서 크로바를 뽑으려고 하면 한 마디에서 잘릴 뿐 아니라 잔디뿌리가 들릴 수 밖에 없었다.
그곳에 체류하던 한 달 간 매일 아침, 풀을 뽑았다. 집을 둘러싸고 있는 사면의 잔디밭은 엄두도 못 내고 현관 앞 잔디밭 두 세 평만 잡초를 뽑기로 계획했다. 중학교 다니는 손자가 학교에 가다가 내 쪽으로 와서 굽어다본다. 어제 다 뽑았는데 밤에 누가 와서 잡초를 또 뿌리고 갔다고 말했더니 그것은 악마(evil)라고 하며 지나간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잔디는 어쩌다가 정원의 피복성(被覆性)식물로 선택받아 보호를 받고 다른 식물들은 뽑아내는 기구를 만들어 뽑아내고, 각 종류의 식물에 따른 제초제를 연구 개발하여 지속적으로 뿌린다. 제초제를 뿌렸다는 곳에 가보니 겉에 있는 이파리는 말라 비뚤어졌으나 뿌리는 여전히 잔디 뿌리 밑에 자리하고 있다. 잔디를 깎으면 잔디 잎과 함께 잡풀의 이파리도 깎이기도 하고, 잔디보다 연한 잡풀은 피침형(披針形)인 잔디 이파리 사이에 엎드려 숨어있다. 그래서 잔디 깍은 다음 날에도 꽃을 피우는 재주를 부린다. 떠나오기 전날 잔디 깎는 기계가 근접하지 못한 나무 밑, 꽃나무 밑, 집 건물의 주변의 훌쩍 자란 잡초를 손으로 뽑고 빨간 멀치를 다섯 부대 사다가 덮었다. 무척 깨끗해 보였다. 멀리서 보면 아름답기도 하고. 그러나 가까이 가서 잔디밭을 굽어다보면 목이 잘렸거나 엎드려있는 크로바, 민들레, 뱀 딸기를 볼 수 있다. 그것들은 그저 잔디인척 하고 있을 뿐이다. 개인 집에 정원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19세기부터라고 하니 200 여 년 동안 집을 가진 자들은 잔디밭을 유지하기 위해 잡초와의 전쟁을 해왔나 보다.
뉴스가 끝나자 나는 미국 아들네 집에 전화를 걸었다. “멀치로 덮은 곳에서는 잡초가 안 올라왔지?”물었다. “아니요. 멀치로 덮은 사이사이에서도 잡초가 뾰족뾰족 올라와요. 멀치를 더 사다 덮어야겠어요.”한다.
2005. 8. 17
* sysop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8-29 21: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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