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士수필] 許 政 의 '바둑감회'
바둑감회
허 정
오랜만에 기우가 찾아와 바둑판에 붙어 하루를 보내고 나니 휴식이 아니라 중노동을 한 듯 온몸이 쑤시고 아프다. 바둑은 인생에 대한 교훈이 된다하여 위기십결이란 바둑두는 자세10가지 요결이 곧 인생의 교훈이 된다고 한다.
즉, 적을 공격하기에 앞서 먼저 자기를 잘 살펴야한다는 공피고아(攻彼顧我), 사소한 이해 득실보다는 큰 곳을 취하라는 사소취대, 경솔하게 하지말고 신중히 하라는 신물경속(愼勿脛速), 적이 강한 곳에서는 자신을 보호하라는 피강자보(彼强者保), 지나치게 급하게 이기려고 하면 손해본다란 부득탐승(付得貪勝) 등이 인생살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래서 바둑을 인생의 축도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생은 바둑과 다르다" 누가 바둑을 인생에 비유하는 말을 들으면 내가 꼭 제기하는 반론이다. 그리고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바둑 두듯 인생을 살면 그 인생은 낭패한다" 여기서 미리 밝혀둬야 할 것은 나 역시 극성스런 바둑애호가 중 한 사람이란 사실이다.
친한 사람들과 둘 때는 허풍을 좀 섞어 1급을 자칭한다. 내가 굳이 "바둑을 인생에 비유하지 말라" 며 나서는 것은 바둑을 낮춰보거나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해서가 아니다. 다만 바둑과 인생은 그 본성이 너무 달라 바둑두듯 인생을 살다가는 인생을 버리게 된다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다. 바둑에 "상대 급소가 내 급소"란 말이 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가장 필요한 점에 내 돌을 놓곤 한다. 상대의 작전을 방해하고 집모양을 일그러뜨리며 어떻게 하든 상대를 괴롭히기 위해서다. 바둑에서는 상대를 골려주고 곤경에 빠뜨리면 곧 내게 이익이 된다. 어쩌다 상대가 실수라면 내 입가엔 미소가 번진다. 내가 봐도 멋들어진 수를 상대가 구사하면 그저 입맛이 쓰다.
"제로섬 게임 "이란 말이 있다. 둘이서 하는 도박과 같이 아무리 오랫동안 게임을 해도 판돈은 늘어나지 않고 그저 둘이서 어떻게 나눠가질 것인가만 놓고 다투는 게임이다. 바둑이 꼭 그런 제로섬 게임이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그렇지 않다. 바둑처럼 "다툼질" 하고 "이감질" 하는 것보다는 함께 힘을 모아 일하는 것이 훨씬 큰 몫을 만들어낸다. 이런 것을 "포지티브 섬 게임"이라고 부른다고 들었다.
바둑처럼 상대방을 괴롭혀 이익을 취하려는 자세로 인생을 살면 당장은 좀 더 얻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결국 모두 잃고 만다. 친구는 떠나고 동료들로부터 버림받는다. 스스로의 인생도 각박하기 짝이 없다. 인간다움과는 거리가 먼 인생이다. 바둑과 인생이 다른 점은 또 있다. 바둑에는 치밀한 "논리"가 가장 중요하다. 상대방 대응까지 고려해 꼼꼼하게 계산하고 온갖 경우를 다 검토한 후 내 한 수를 둬야 한다. 논리적이고 냉정한 작업이다. 그러나 인생은 그렇지 않다. 치밀한 논리도 물론 중요하지만 일에 대한 성실성, 생활에서의 진실함, 가족과 동료에 대한 사랑, 용기있고 분명한 선택, 따뜻한 인간미 등을 더 필요로 한다. 차가운 논리에 지나치게 의존하다가는 큰일 난다. 바둑은 한 판두고 다시 둘수 있다. 바둑을 익히는 대는 복기 가 중요하다. 반면 인생에는 연습이 없다. 철저히 일회성이다.
송 의 육상산은 하도낙서주역이치(河圖落書周易理致)가 바둑속에 있다고 갈파했으나 바둑의 한판은 천연만화 의 과정을 겪는다. 인생도 역시 한평생동안 수많은 호기와 위기 가있다. 그 인생의 기회 가운데 바둑 한판에 행과 불행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바둑 한판 두는 사이 인연이 깊어져 재상의 대우를 받은 도림이 있는가 하면 바둑 한판에 몰입하다가 거란군에게 패하여 포로까지 되었다가 결국 죽음을 당한 강조의 일생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바둑 한판에 인생의 행과 불행이 결정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인생이 바둑에게서 배울 것도 많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몇 점 접어주고 두는 접바둑이다. 상수와 하수가 어우러져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지혜이다. 인생에서도 꼭 이겨야만 할 한판 승부가 아니라면 한수 접어주는 모습이 아름답다. 그런데 바둑을 인생과 구분짖는 가장 결정적인 측면은 따로있다. 바둑의 고수들은 바둑을 두다 열 집 남짓 차이가 나면 돌을 던진다. 그게 고수의 도리라 한다. 그러나 인생은 그렇지 않다. 절대 도중에 돌을 던지면 안된다. 나보다 몇 집 더 많은 상대방의 인생도 훌륭하지 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내 인생도 더할 나위없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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