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뒤의 초록물결 - 劉庚煥 -
서울 시청 앞 전철역에서 한 시간쯤 걸리는 곳에 집을 마련한 지 이십 년이 지났다. 그 시절 내 결정에 모두 어리석은 짓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오늘날 집 바로 뒷쪽에 초록물결이 일렁이는 논을 바라보며 야호 소리를 크게 지른다. 그 속뜻은 ‘내가 정말 어리석으냐’이다.
공기 맛이 다르다. 바람 냄새도 다르다. 논두렁을 걸어 보면 일요일의 하늘이 얼마나 고운지 한눈에 알 수 있다. 개구리도 만나고 잠자리, 나비도 만난다. 풀꽃들 그 작은 꽃잎 위에 이슬이 맑은 것도 본다.
이런 것들은 잃어버릴 염려가 없는 것들이다. 아무도 도둑질해 가지 아니한다. 자연 그대로 내버려 두어도 되는 것들이다. 그래도 아름답기 한이 없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경지, 일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보는 경지에서 노닐 때엔, 일체를 그대로 긍정하는 셈이다. 천하(天下)를 천하 속에 감추어 둔다면 다른 것은 더 이상 숨겨 놓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앞 줄에서 내가 쓴 자연이라는 이 말이(내 짧은 상식에 근거한다면) 중국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장자(莊子)의 덕충부(德充符) ‘혜자위장자왈(惠子謂莊子曰)’의 대목이다.
이 대목에서 자연는 도(道) 자체의 작용, 도 자체의 활동의 의미로 씌였다. 그런데 이 도가 사람의 얼굴 모양을 만들어 준다고 설명하고 있다.
논이 있고 밭이 있고 도랑이 흐르고 오솔길이 그 옆에 붙어 있고, 마른 나뭇가지로 엮은 울타리 건너 마을이 뵈고, 그 옆에 염소 한두 마리와 집 지키는 개, 그리고 또 다소곳한 잔디무덤 몇 기를 위해 아늑한 산비탈이 내려오다 멈춰 준 곳.
언제나 조용한 이야기가 맨볕 모이듯 따스한 마을. 나는 이 마을 분위기에 끌려 언제나 여기까지 온다. 이 마을이 산의 어깨 밑으로 길게 퍼져 있는 곳에서 발을 멈춘다. 왜냐하면 이 마을에서 어쩌다 만나는 사람들 얼굴 표정을 유심히 보기 위해서다. 이곳까지의 산책에서 늘 생각하게 되는 것은, 도(道)가 사람의 얼굴 모양을 만들어 준다는 한마디, 바로 그 화두이다. 이 화두의 밑바닥 어디쯤엔 ‘내 얼굴의 생김새는 내 생각 어떤 것이 작용했을까.’를 걱정스럽게 생각하는 염려가 깔려 있다. 나는 그것을 감히 도(道)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이런 생각은 서울의 좁디 좁은 골목길에 웅크리고 살 때엔 꿈에도 가져보지 못한 것이었으니, 전원생활이란 이만큼 여유로운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여유로움을 나는 지금 햇볕과 바람기와 그리고 공기 맛으로 느끼고 있다.
에릭 프롬은 『애정 예술(The Art of Loving)』에서 말했다. 사랑의 예술은 투박한 그대로 아름답다. 그 극치는 정교(精巧)가 아닌 순수다. 세상살이는 나 아닌 것도 나처럼 사랑하는 일. 이런 세상살이를 기술(技術)로 여기지 않고 순수의 실천으로 여기면, 생활을 그토록 힘겹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 고달픈 것은 몸이 아닌 마음이기 때문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첫 새벽 여섯 시에 직장에 닿아, 저녁 여섯 시 회사 문을 뒤로 하고 퇴근할 때까지 열심히 일하며 긴장하고 산다. 그러나 일요일 하루만은 황금처럼 아껴가며 살고 싶다.
논밭을 할 일 없이 거닐듯 가로질러 거닐고, 산자락 겨드랑이에 숨은 풀꽃, 작은 벌레, 부리 고운 새들과 만나 투박하나 순수하게 눈맞춤해 가며 대화를 시도해 본다. 내 앞뒤의 흙, 풀, 나무 모든 것을 그대로 사랑하며 그들 옆에 나란히 서 본다. 정답게 마음 주고 그들의 마음이 있다면 고스란히 되받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귀한 하루를 지내는 것이 일요일의 내 삶의 방식이다. 여기서 나는 풀 향기처럼 은은한 내 삶의 기쁨을 얻는다. 여기에다 더 보탤 즐거움이 또 있겠는가.
가끔 하늘의 별이 내게 부어주는 이야기를 내 손자들을 위해 동화로 쓴다. 동화로 쓰려면 먼저 내 가슴을 별이 뜨는 별밭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 가슴을 별밭으로 가꾸는 일이 실은 동화 쓰기보다 더 오래 걸리고 더 어렵다.
그러나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일이기에 좁은 가슴을 넓은 밤하늘로 가꾸고, 얕은 가슴을 깊은 밤하늘로 가꿔 보려고 애써 본다. 그러면 눈짓만으로도 별들은 넉넉히 이야기를 내 가슴에 심어 준다.
내게 눈짓을 보내기 위해 별들은 아주 멀리서 기다린다. 이런 기다림을 알고서는 산책을 일찍 마칠 수 없다.
햇볕이 사그러지고 땅거미가 지고 밤하늘이 천천히 밀려오기까지 나는 머뭇거리며 자연을 보면서 도(道)를 생각한다. 아니 어떤 때엔 저녁밥을 먹고 다시 논두렁에 나서기도 한다. 집 뒤의 초록물결.
요즘 초록이 곱다. 이것은 세월의 달력이다. 숫자 대신 정확하게 절기가 오는 것을 일러준다. 그리고 한 해의 세월이 얼마나 빠른가도 보여 준다. 바람결에 초록물결이 춤추면 사월이요, 그 색감이 짙푸르러지면 오월이요, 이렇게 노래하듯 세월이 바람으로 지나간다.
어느새 이삭이 고개 숙이고 황금물결이 되어 겨울 정취를 예고해 주면 나도 다시 나이를 짚어 보게 된다. 그래 답답해지면 오솔길이 넘어간 언덕 너머 야산으로 올라가 김포평야가 끝간데까지 눈길을 주어 김포 비행장을 찾아 낸다. 끝간데없이 너른 초록물결에서 싱싱한 목숨의 몸짓을 본다. 생명의 힘을 느낀다.
사월은 사월을 위한 투자의 달이려니 하고 계산해 본다. 수확의 시작은 시월이 아니고 이미 지금부터가 아닌가.
이십여 년 전 이 산비탈 붉은 진흙땅 한 뼘을 샀던 돈으로 그때 아파트에 투자했던 사람들은 지금 고급 빌라에서 편히 살겠지만, 그러나 마음으로는 나만큼의 부자가 못되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경지에서 노닐 땐, 천하를 천하 속에 감춰두는 것과 같다고 하지 않는가. 나의 초록 예찬은 나의 기도와 다르지 않다. 나의 기도가 내 표정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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