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 고양이가 된 날
박숙자
엘리베이터가 너무 천천히 올라간다. 고층 아파트에 사는 것이 원망스럽다. 가슴은 콩닥콩닥 뛰다 못해 “이젠 될 되로 돼라”는 배짱마저 생긴다. 50이 넘은 나이에 도둑고양이가 된 나는 보는 사람도 없는데 한껏 구부리고 현관문 사이로 스며들었다.
이미 집안의 전등불은 다 꺼졌다. 늦은 귀가 자를 위해 작은 등불은 꼭 켜 놓았었는데, 남편의 심기가 불편함을 꺼 버린 등에서 느꼈다. 멀리 보이는 건물의 불빛마저 없다면 어둠 속에서 허우적댈 것이 뻔했다.
조심조심 옷을 벗어 걸었다. 살금살금 몇 발자국 떼자마자 무엇이 앞발에 콱 채인다. 우다당탕...아뿔사...다리미판과 다리미를 발로 차 버린 것이었다. 종일 구두 속에 갇혀 퉁퉁 부어있던 발가락이었다. 어찌나 아픈지 눈에서 불이 번쩍 인다. 발가락이 붙어있는 것이 용하다.
요즈음 우리 집은 두 내외만 남았다. 장가 간 큰애는 그렇다 치고 둘째마저 직장 따라 멀리 떠나고 나니, 갑자기 중년(?)의 신혼생활이 시작되었다. 젊었을 때는 이런 저런 볼일로 좀 늦어도 아이들 웃음소리에 파 묻혀 넘어갔는데, 이젠 나이가 든 탓인지 남편이나 나나 혼자 먹는 밥상은 서로들 싫어했다. 그런 판에 한 밤중의 귀가라니,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뜨고 다리미를 찬 발가락을 원망할 틈도 없었다.
왜 그렇게 앞뒤를 가리지 않고 버스를 탔는지 천천이 해도 될 일을. 친구와 이야기 도중 “그래, 우리가 직접 가서 보자” 결론은 가서 보자는 것 그것뿐이었다. 가지 않으면 일이 해결되지 않을 것처럼 마음이 급했다.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 건 이 급한 성질 하나다.
직행버스터미널이 다행이 집 가까이 있었다. 예정된 시간에 직행버스는 달랑 우리 둘을 태우고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버스가 연계만 잘 되면 오 가는데 대 여섯시간, 그 시간이면 갔다 오는데 별 무리가 없으리라.
며칠전, 알뜰하고 눈썰미가 좋은 명희에게 들렸었다. 명희의 감각이 묻어 나는 찻상에서 우린 이른 가을을 마셨다. 솔 향이 아직도 배어있는 찻상은 때묻지 않은 순결을 간직하고 있었다. 순창에 아는 분이 있는데, 선물을 받았다고 했다. 설익은 목수가 연장 탓한다더니, 내가 바로 설익은 목수였다. 여태껏 사용하던 찻상이 너무 밋밋해 보였다. 나도 명희처럼 모양도 좀 새롭고 솔내 진한 나만의 찻상을 갖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 욕심이 오늘 우리를 직행버스 앞자리에 앉히고 말았다. 기다리면 좋은 찻상(?)을 받을 수가 있을 텐데.
목적지는 순창이었다. 순창 가는 길은 국도였다. 4차선으로 단장한 국도는 고속도로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스치는 들녘의 풍요로움은 “쪼로록” 소리나는 뱃속도 채워 주었다. 가을하늘은 청자 빛이었다. 산자락위로 하늘과 호수가 함께 어깨동무하고 있었다. 잘 익은 벼이삭들의 속삭임,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의 손짓, 가을은 넉넉한 몸으로 우릴 감싸안는다.
드디어 목재소에 도착했다. 우리 설명을 들은 목재소 사장은 오 가는 품이 너무 들으니 기다렸다가 만들어 갖고 가라는 친절한 마음을 보인다. 우리야 감격 그 자체였다. 고마웠다. 머리속에는 근사한 찻상이 다 만들어졌다. 그러나 아름드리 통나무를 골라 찻상을 만드는 것이 생각보다 간단하지가 않았다.
어느새 짧은 가을 햇살이 소리도 없이 산 속으로 숨어버렸다. 주위가 캄캄해졌다. 정신 없이 놀다 무서움을 느낀 어린애처럼 친구와 나는 정신이 버쩍 났다. 전화기를 꺼냈다. “웬 순창” 남편들 둘이 동시에 놀랜다.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기엔 전화선이 너무 짧았다.
“형님들이 참말로 부럽고만요, 그래도 제가 쪼금 겁이 난당게요 집에 들어가서 혼나시면 어쩐당가요”
목재소 안주인은 나이를 따져 동생이 되길 자청했고 정 많은 그녀가 우리들 걱정에 더 안절부절못한다. 우리들은 타는 속을 차마 그녀에게 내 비치지 못하고
“걱정하지 말어, 아 우리가 나쁜 일 하러 왔나, 말 안한 것이 조금 걸리지만 집에 가서 잘 말하지 뭐” 이제까지의 호기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어둠속에서 두근반 세근반 뛰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우린 다짐했다. 여기서 설명하다 벼락맞지 말고 가서 몸으로 부닥치자고.
결국 찻상은 다음날에 보내주기로 하고 역순으로 발길을 돌렸다. 늦은 시간대에 이미 직행버스는 끊어지고 이리저리 바꿔 타고 집 앞에 다다르니 어언 자정이 다 되었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고 했나, 집에서 기다리는 사랑(?)을 위해서 가슴 졸이며 달려온 그 고통의 시간은 쓰디쓴 입맛만 내게 남겨놓았다. 게다가 욱신거리는 발가락은 좀체 통증이 가시질 않았다.
“당신 지금 도착한 거야, 피곤한데 어서 자라고” 생각지도 않은 남편의 음성이다. 불호령을 감수하고 있는데. 우와, 오래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있구나 싶다. 이럴 줄 알았다면 불이나 확 켜고 마음놓고 다닐걸. 내팽개쳐진 다리미와 부은 발가락이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볼멘 소리로 내가 왔음을 알렸다. “당신 때문에 내 발가락 다 깨졌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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