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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 외우기
이 일 헌
웹 서재 사랑방에 새 글이 올라 있다. D 님이 남긴 글이다. 이 집 주인과 함께 읽고 싶다는 전언에 이어진
글은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 번역문이었다. 오랜만에 옛글을 천천히 따라가노라니 홀연 지난 일들이 떠올라, 마치 잠자던 화로에서
불씨가 살아나듯 몸이 점차 달아오른다.
한동안 <적벽부>에 마음을 빼앗긴 적이 있었다. 1980년대 초반이라 생각된다.
그 즈음 나의 집에서 몇몇 다우(茶友)들이 모여 중국문화사를 공부하였다. 진시왕 편을 토론하던 날이었다. 대학생인 초안(草安) 고(高) 군이
말하길, 오늘은 중국 송(宋)나라 때 소식(蘇軾)이 <적벽부>를 지은 지 900년째 되는 날이라고 했다. 음력으로 임술년(壬戌年)
칠월 열엿샛날이었다. 그는 그 글에 대한 자세한 해설에 이어 부(賦) 전문을 멋들어지게 읊조렸다. 뜻밖이었다. 젊은 친구가 한문으로 된 고전을
거침없이 암송할 줄이야! 우리들은 환호작약하며 손뼉으로 장단을 맞추었다. 그것을 녹음하고 ‘後 적벽부’를 지은 시월 보름에는 한강에서
뱃놀이하자고 약속도 했었다.
그 약속은 불발에 그쳤지만 그날의 감동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적벽부의 음률이 내내 귓가에 맴돌았다.
어느 날 문득 초안의 흉내를 내보고 싶어졌다. 나도 그 문장을 한번 그럴싸하게 읊어보고 싶었다. 감히 엄두 내지 못할 일인데도 꼭 그러리라
다짐했다. 그 날부터 우리 집 안방과 부엌에는 적벽부를 쓴 종이가 벽보처럼 나붙었다. 입으론 종일 ‘임술지추(壬戌之秋)……’, 마치 초등학생
구구단 외우듯 중얼거려댔다. 중고생인 두 아이도 나만 보면 웃음을 흘리곤 앞부분 두어 마디 흉내를 내기도 했다.
작심은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문(古文)을 술술 읽어 내리기도 어렵거니와 공부와 생각이 모자라 글의 의미도 선뜻 다가오지 않는다. 더욱 부의 자 수가
적지 않아 한 번 훑는 데만도 십여 분 넘게 걸린다. 어쩌다가 두어 구 외웠다 싶었는데 다시 시작하면 마치 지우개로 지운 듯 하얗다. 그렇다고
이미 벌려 놓은 일, 가족 보기가 민망하여 포기할 수도 없었다. 무작정 눈으로 입으로 ‘임술지추 칠월 기망에 소자여객으로……’ 이것을 수없이
되풀이 하는 일로 많은 시간을 보냈었다.
몇 달 만인가, 드디어 성공했다. 암기력에 자신 없는 내가 천하의 고전(古典) 한 편,
한문 오백서른여덟 글자를 외운 것이다. 그것은 그즈음 나에게 첫 번째로 꼽을만한 기쁨이었다. 하지만 어디 암송만으로 끝날 일인가. 글의 음과
운이 살아야 한다. 멋이 있어야 한다. 녹음해둔 초안의 소리를 따라가며 무릎치고 장단을 맞추어 본다. 음의 높이를 내리기도 올리기도, 이제
웬만하다 싶어 녹음테이프를 틀면 기대와는 달리 그야말로 얼치기다. 멋은 고사하고 음치가 가곡을 부르는 꼴이었다. 하긴 겉멋으로 외운 명문,
글맛이 쉽게 살아날 리 없다. 더 정을 쌓고 정진하여, 글의 뜻이 가슴 속에서 잘 익은 포도주처럼 숙성도록 기다려야 했다.
아는
글자도 다시 자전(字典)을 뒤적였다. 본문에 인용된 명문(名文)이나 고사(故事)를 세세히 살펴보기도 한다. 머릿속엔 가을 달밤 적벽강의 즐거운
뱃놀이 영상을 떠올리며 그 흥취를 불러들이는 연습도 해 보았다.
첫장의 “임술년 가을 7월 기망에 소자(蘇子)와 손(客)이 배를
띄워 적벽 아래 노닐새 … …”로 시작되는 적벽의 야경과 흥취 편은 담담하게 시작하여 점차 속세를 떠나 신선이 되어 오르는 기분으로 읊어야
하리라. ‘퉁소 소리’ 대목에 가서는 그 소리가 이어지는 듯 끊어지는 듯 가슴이 저미는 슬픔을 자아내야 한다. 손(客)의 독백인 ‘인생무상’ 편
중에 옛 삼국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묘사한 부분에서는, 글 한 자 한 자마다 힘을 주어 그의 기상과 풍류를 잘 나타내야 하고, 아득한 바다에
던져진 한 알 좁쌀 같은 우리 인생을 탄식하는 장면에서는 다분히 애조 띈 분위기에 빠져들어야 하리라. 또한 “소자(蘇子)가 이르기를 “손도 저
물과 달을 아는가?” 이 글 주제 부분을 노래할 때에는 무소유의 긍정적인 인생관을 낭만적인 목소리에 잘 담아내야할 것이다. 그리고는 달관의
미소를 지긋이 머금은 채 마지막 ‘화해의 술자리’를 마무리해야 좋으리라.
그 무렵 암송한 것은 <적벽부> 외에 도연명의
<귀거래사>였다. 아무런 목적을 두지 않았던 옛글 외우기, 그것은 나의 숨겨진 희열 중 하나였다. 더욱 중국 문예사에 눈 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어, 그즈음부터 달려들었던 차문화(茶文化)를 공부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훨씬 지나 컴퓨터를 처음 배우게
되었을 때, 적벽부와 귀거래사의 원문을 파일로 만들어 보관하고 싶어 며칠에 걸쳐 자전을 뒤적이던 일도 생각난다.
겨우 암송한 고전
두어 편은 언제나 성능 좋은 안테나를 하나씩 달고 있었다. T.V나 신문, 어디서든 이와 연관된 이야기만 나오면 귀가 솔깃해졌다. 어느 날 친구
따라 서예전시회에 갔다가 행서체로 쓴 “유강상지청풍 여산간지명월(惟江上之淸風 與山間之明月)”의 글귀를 보았을 때 <적벽부>의
문구라는 것을 알았다. 순간 지음(知音)을 만난 듯 절로 얼굴에 웃음이 빙 돌았다. 또 두 해 전에는 우연히 ‘선(禪)과 생활’이란 제목으로
녹화된 어느 대선사(大禪師)의 비디오 설법을 듣게 되었다. 그 중에 ‘적벽부’ 이야기가 나왔을 땐 나도 모르게 등이 곧추 섰다.
옥살이와 좌천, 유배생활 등, 벼슬길에서 험한 고통을 받았던 소식이, 흥룡사의 한 스님을 만난 후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소식은 “저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는 다함없는 부처의 설법이요/ 저 산 빛은 청정한 부처의 몸 그대로가 아닌가/ 어젯밤 들은 여래의 팔만사천
오묘한 법문을/ 다른 날 그대에게 어떻게 전할고” 라는 오도송(悟道頌)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적벽부’는 부처의 빛을 본 동파거사의 생명의
노래, 긍정적 인생관인 실상(實相) 일원(一元)의 세계를 찬연한 문장으로 드러낸 것이라는 선사의 말씀이 크게 들렸다.
“손(客)도
저 물과 달을 아는가. 강물은 밤낮없이 흘러가지만 일찍이 없어지지 않았으며, 저 달이 찼다 이지러졌다 하지만 그 본체는 마침내 줄고 늚이
없으니, 변화(變化)의 관점에서 보면 천지에 일순간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 변하지 않는 측면에서 보면 만물이나 내가 모두 다함이 없어
영원한데 무엇을 부러워하리오.”
이 설법을 듣는 동안 몇 차례 심연을 치고 가는 시원한 바람을 느꼈다. 실로 이원(二元)의
분별세계를 초탈하여 대자연의 본체를 본다면 세상 어느 것도, 삶과 죽음도 결코 둘일 수가 없는 것이다. 정녕 모든 생각은 마음에서 만들어 지는
것, 그제야 비로소 <적벽부>가 안개 걷혀가는 산봉우리처럼 내 가슴에 아스라이 다가오는 것이다. 큰스님의 명 설법 덕분일 것이다.
내가 멋모르고 옛글을 외우고, 또 그것을 오래도록 가슴에 품고 있었던 공(功)도 없지 않으리라.
만추의 창밖엔 열이레 달빛이
고요하다. 이웃 한강에서도 월색으로 물든 강물이 일렁이고 있을 것이다. 이제쯤 마음 맞는 벗들과 뱃놀이 즐기며, ‘가져도 금(禁)하는 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는’ 저 고운 달빛과 맑은 바람을 온 몸으로 껴안고 ‘임술지추 ……’ 고전 한 편을 근사하게 읊조린다면, 이 왜소한 생명도 신선한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을까.
『에세이 문학』 통권 91호, 2005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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