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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고무신 / 장생주
늘 닫혀있는 대문 틈사이로 집안을 들여다 보면 툇마루엔 언제나 하얀 고무신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아무리 둘러 보아야 인기척도 없는 빈집에 사람이 있음을 알리기라도 하듯 댕그만히 놓여있는 하얀 고무신 한 켤레.가까이에서 보면 꽤 닳은 신이언만 멀리서 보기엔 백옥처럼 하얀 빛이 도는 신.행여 먼지라도 낄 새라 씻고 또 씻어 언제나 윤기가 자르르 도는 고무신이다.코끝이 찡하게 감동을 주는 그 이쁘장한 코뿌리하며 약간 때절은 저고리동정처럼 눈에 익은 뒤축이며 한치의 흐트러짐없이 가지런히 놓인 매무새가 해맑은 햇살을 받아 더욱 정갈해 보이는 고무신이다.
모처럼 집을 잠시 떠났다가 대문께에 이르러 집안을 들여다보면 하얀고무신이 늘 반갑다.그때마다 대문을 두드리며 어머니! 를 불러 보면 안방문이 사르르 열리고 8순 노모님께서 버선발에 고무신을 신으시고 대문께로 나오신다.그럴때면 하얀 고무신은 늘 하얀 버선발에 어울려 제법 사랑스럽다.가만 가만 밟으시는 걸음마다 어머니의 치맛자락 속에서 보일 듯 말 듯한 고고한 품새가 또한 일품이다.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하얀 버선에 하얀 고무신.한복이 어우러져 한국적인 멋을 창출해 내는 재주도 지녔다.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멋이다.어찌 보면 정적인 듯 싶으면서도 동적이고 동적인 듯 싶으면서도 정적인 포근함이 어머니의 사랑인 듯 한인 듯 참으로 초연한 모습을 자아내기도 한다.
지난해 어느 여름날이었다.어머니께서는 오랜만에 나들이를 하시기로 작정하셨다.젊어서는 한가하게 집안에 잠시도 머무를 틈도 없이 바깥일만 하시던 분이 언제부터인가 노환으로 장구경은 물론 마실조차 다니지도 못하시게 되었다.그러던 분이 허리 아프신 데 좋다며 십리 산길 재너머 고성사에 가서 물을 맞아 보시겠다며 손자,며느리 앞세우고 집을 나서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정작 신고 갈 고무신이 없어졌다.어머니께서 어제 해질녁에 손수 깨끗이 닦아놓은 하얀 고무신이 없어졌다는 것이다.온 집안을 샅샅이 찾아 보았다.헤어질대로 헤어진 낡은 고무신 뿐.하얀 고무신은 나오지 않았다.손자녀석이 운동화를 끌고 와서 신으시라고 권했다.며느리가 실내화를 신으시라고 권했다.그러나 어머니께서는 오로지 그 하얀고무신만을 찾으시는 것이었다.어머니께서는 뭔가 소중한 것을 잃으신 듯 실망이 대단했다.
모처럼 작정한 나들이를 포기할 것인가? 고민끝에 어머니께서는 며느리의 신을 신고 집을 나섰다.그러면서도 자꾸만 뒤돌아보며 가시는 모습이 단 벌 고무신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셨다.고개를 오르다 말고 돌아 보고 또 돌아 보시는 어머니! 그 모습이 웬지 마음에 걸려 난 다시 집안을 발칵 뒤지기 시작했다.그러다 한참만에 문제의 그 하얀고무신을 찾았다.그런데 그게 뜻밖에도 안방 어머니의 반닫이 옆 틈새에 잘 간수되어 있었다.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도 괜찮을 고무신을 어머니께서는 어쩌자고 안방 으슥진 곳에 두셨을까? 어쩌면 어려서 소풍가기전 날 잠을 설치던 어린아이처럼 오랜만의 외출을 준비하시노라 신을 씻고 또 씻어 손가까이 둔다는 게 깜박 잊으신 것 같았다.
하얀고무신을 툇마루끝에 가지런히 놓고 보니 정말 먼 길 떠나시면 어쩌나싶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그 기나긴 여정.이제는 저물어 가는 날처럼 시시각각으로 가까이 닥아든다는 죽음의 문앞에서 어머니께서는 날마다 무엇을 생각하고 계실까? 정녕 먼길 떠나시는 그 고갯마루에서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 보실 어머니!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서럽다.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슬프게도 울어쌓던 그날의 아픔이며,오두막집 싸립밖에 사자밥과 나란히 놓여있던 세 켤레의 짚신짝의 애절함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은데…어머니는 정녕 떠나시려는가.
하얀 고무신.
한 평생을 양장 한 번 않으시고 그 흔한 구두 한 켤레 신어보시지 못한 어머니.그 어머니의 버선발에나 어울리는 고무신이다.행여 짝이 바뀔 새라 마실을 가실 때면 마음께나 쓰시고 십자표도 하고 아예 마루나 방 한 구석에 숨겨 두었다가 신고 나오시던 고무신이다.옷매무새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셨어도 고무신만은 늘 샘가에서 닦으시고 물기 한 방울 묻지 않도록 신경을 쓰시고 계시는 걸 보면 어머니께서는 고무신이 결코 하찮은 물건이 아닌 것 같다.더구나 요즘처럼 바깥 출입조차 못하시고 하루.이틀.사흘.그날 그날이 똑같은 일상이지만 날로 새로워지는 초조함과 강박관념을 그래도 고무신을 닦아보며 조용히 마음을 다스려 보는 소일거리가 남아있다는 게 정말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얀 고무신.
깡마른 발밑에서 가끔은 수모를 당할지라도 마지막 가는 길엔 동행할 유일한 동반자인가? 어머니께서는 산길 10리길,험한 재너머 고성사에 다녀오시면서도 줄곧 고무신 걱정만 하셨다지 않은가? 이제는 애지중지 기르던 자식들조차 다 떠나 보내고 텅 빈 집에서 행여 아이들이 오려나 기다려지는 시각이면 괜히 신었다 벗었다 애태우는 어머니의 고무신.어머니께서 먼 길 떠나시고 나면 다시는 구경조차 못할 하얀 고무신.그 고무신이 오늘따라 정겹기만 하다.(1990년)
* sysop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10-26 21: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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