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와 아마츄어
김학
사진을 찍는다. 나도 남을 찍어주고, 남도 나를 찍어준다. 카메라가 대량으로 보급된 실정이고 보니 카메라맨이 따로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이도 어른도 소풍이나 여행을 떠나면 카메라부터 챙긴다. 오늘날에는 어느 집이고 카메라 없는 집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누구나 사진을 찍기는 하지만 필름을 현상하여 사진을 빼보면 사진다운 사진은 별로 없다.
지난번 2주일 동안 미국에 다녀 올 기회가 있었다. 워싱턴, 뉴욕, 디트로이트, 라스베가스, 로스엔젤레스, 하와이, 나이아가라 폭포, 그랜드 캐년을 훑고 다니면서도 많은 사진을 찍었다. 내가 소모한 필름만 해도 10여 통이나 되었다.
내가 나를 찍을 수 없어서 일행과 서로 교대해 가면서 셔터를 눌렀다. 내 카메라로 일행을 찍기도 하고, 그들의 카메라로 나를 찍기도 하였다. 그러나 귀국하여 사진을 빼어보니, 그 많은 사진 가운데 액자에 담아 걸어둘 만한 사진이 별로 없었다. 아무나 셔터를 누른다 하여 예술사진을 창작해 낼 수는 없는 일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카메라 제조기술이 발전하여 누구나 셔터를 누르기만 하면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었다. 원근(遠近)이며 역광(逆光), 날씨 등을 꼬치꼬치 따지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사진을 빼놓고 보면,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다는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있을 뿐, 예술사진일 수는 없다. 그러기에 카메라가 대량으로 보급된 요즘에도 사진작가가 따로 있고, 또 그들이 예술가로서 대접을 받는 게 당연시되는 모양이다.
그림을 그린다. 아이들도 그림을 그리고, 어른도 그림을 그린다. 아마추어도 그림을 그리고 이름난 화가도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그림은 다 같은 그림이되 모든 그림이 다 예술작품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 호당 2천만 원을 호가하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작품 한 편에 8억 원을 받는 그림도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고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지만, 그들 모두가 사진작가로서, 화가로서 예술가의 칭호를 받지는 않는다.
문학의 경우도 그렇다. 문학에도 여러 갈래가 있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시, 소설, 수필, 희곡, 평론, 아동문학 등 장르가 다양하다.
누구나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을 수 있듯, 글도 쓸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다 문학가일 수는 없다. 그것은 마치 운동을 즐기는 사람을 일컬어 모두 운동선수라 하지 않고, 가요나 가곡을 멋지게 부른다 하여 그들을 가수나 성악가라고 부르지 않듯이―.어느 분야가 되었던지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은 구분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도 유독 이게 제대로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는 분야가 있다. 문학의 한 장르인 수필이 그렇다.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사진을 찍을 수 있으며, 노래를 부를 수 있고, 운동을 할 수 있듯이, 누구나 수필을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수필을 몇 편 썼다고 하여 누구에게나 수필가란 호칭을 부여할 수 있을까.
어느 예술 장르던 마찬가지 일 줄 알지만 특히 문학의 경우는 등단(登壇)이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신문의 신춘문예(新春文藝)나 문예지(文藝誌)의 추천이란 관문을 거쳐야 한 사람의 문인으로서 공인을 받게 된다. 물론 스스로 습작과정을 거쳐 한 권의 작품집을 출간하여 문단(文壇)에 얼굴을 내미는 경우도 없진 않지만, 앞서 열거한 두 가지 길이 보편화되어 있는 게 우리네 문단풍토다. 시인, 소설가, 평론가, 희곡작가, 아동문학가 등 어느 장르에 속하든 수필원고 청탁을 받으면 대개가 응하곤 한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 자기 나름의 전공에 따른 호칭이 있기 때문에 수필가란 호칭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70년대부터 수필은 많은 독자층을 형성하게 되었고, 80년대 이전에도 등단과정을 거친 수필가들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겨우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 까닭으로 70년대 이전의 우리나라 수필 문단은 시인이나 소설가, 평론가 등 다른 문학장르에 속한 문인들이 주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들이 수필이란 텃밭을 일궜고, 씨앗을 뿌린 셈이다.
80년대는 그들 수필 선지자들과 전문 수필가들의 텃밭 공동 경작기다. 그러나 90년대부터는 그 동안 배우고 익힌 솜씨로 전문 수필가들이 그 텃밭에 뿌려진 씨앗을 싹이 트게 하여 가꾸고 수확하도록 밀어주고, 선지자들은 자기 본령(本領)으로 돌아가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신문과 잡지라는 활자매체로 출발한 정보산업은 라디오와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를 거쳐 CATV, DBS, HDTV 등 날로 달로 새롭게 발전해 나가고 있다. 그런데도 문학은 이들 뉴 미디어를 외면한 채 활자매체 만을 지아비로 섬기며 일부종사를 하려 한다. 춘향이의 이 도령을 향한 정절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오랜 전통은 쉽사리 바뀔 가능성마저 보이지 않는다.
문학이 활자매체의 바지가랑이를 부여잡고 있는 동안, 음악·미술·연극 등 다른 예술장르는 라디오·텔레비전 등 전파매체를 자기네 안방으로 활용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는 어찌 되었는가. 광대라고 괄시받던 이들은 오늘날 스타로 군림하게 되고, 그들의 생활형편 역시 상류층으로 치솟았다. 활자매체가 문인들에게 지급하는 원고료와 전파매체가 스타에게 지불하는 출연료를 단순 비교한다면 그 해답은 명약관화하리라.
농경사회가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상 서열이 뒤바뀌었듯이 활자매체에서 전파매체로 영향력의 크기가 달라지면서 예술장르의 서열도 바뀌고 만 것이다. 또 문학이 활자매체의 울타리 안에 갇히어 안주하게 되자, 신문이나 잡지 등 활자매체 편집자들의 횡포를 피할 길이 없게 되었다. 원고료는커녕 지면(紙面)을 얻은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 뿐만 아니라 신문 잡지의 편집자들은 멋대로 수필가를 조작해 내기도 한다. 시인이니 소설가니 대학교수니 하는 식의 적당한 호칭이 없을 경우엔 멋대로 수필가란 호칭을 붙여 버린다. 관명(官名)을 허투로 사용하면 관명 사칭죄에 해당되지만 수필가란 호칭은 불행히도 관명이 아니니 속수무책일 수밖에.
수필이 수필가의 전유물은 아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수필가란 호칭을 부여하는 것도 권장할 바는 아니다. 수필을 엄연히 문학의 한 갈래로 인정 할 수밖에 없다면 등단의 관문을 거친 사람에게만 수필가라는 호칭을 붙여야 할 것이다. 수필 몇 편 썼다고 수필가라고 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아울러 문학도 이제 활자매체의 울타리를 벗어나 전파매체에 접근해 보는 게 어떨지…….
어떤 이는 방송을 일컬어 제2의 신이라고도 했다. 또 어떤 이는 방송의 위력을 원자탄의 위력에 견주기도 했다. 실제로 활자매체를 선호하는 독자보다 전파매체에 접근하는 시청자가 월등히 많지 않는가. 어떤 이는 텔레비전을 일컬어 제5의 벽(壁)이라고 했다. 또 어떤 이는 텔레비전을 세계로 열린 창이라고 했다. 책상이 없는 가정은 있어도 텔레비전이 없는 가정은 없다. 이러한 문명의 위기를 문학은 언제까지 개 바위 보듯 할 것인가.
문학과 전파매체는 얼마든지 상부상조 할 수 있는 사이다. 라디오는 라디오대로 텔레비전은 텔레비전대로 문학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다. 게다가 인터넷은 시와 수필의 전성시대를 열어주고 있다. 인터넷은 수필의 문호를 활짝 열어주고 있는 셈이다.
희곡과 소설은 드라마로 꾸미면 되고, 평론은 강좌(講座)로, 시·수필·아동문학은 있는 그대로 소화시키면 된다. 텔레비전보다도 라디오는 더더욱 문학과의 접목이 용이한 매체다.
나이가 들어가면 시력(視力)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책을 읽으려면 돋보기 안경을 끼지 않으면 안 되고, 돋보기 안경에 의지하여 책을 읽노라면 오래지 않아 피로를 느낀다. 따라서 책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사람의 몸값이 열 냥이라면 그중 눈이 아홉 냥이라는 이야기를 실감할 나이에 이르면, 독서와는 아듀를 고해야 한다. 틈나는 대로 푸른 하늘에 시선을 꽂거나, 푸른 잎새를 응시하며 눈의 피로를 덜어 주기에 바쁘다.
시간은 상황을 변화시킨다. 그 새로운 상황에 잘 적응하지 못하면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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