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學』의 지혜
李 應 百
얼마 전에 한(韓)·중(中)·일(日) 세 나라를 대표하는 대학생들이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가졌던 친선(親善) 모임에 우리측 학생들을 인솔해 갔다는 교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선 중국과 일본 학생들의 발표 내용을 漢字를 섞어 우리말로 번역을 해 주었더니 서울대, 연고대 등의 대표학생들이 그것을 제대로 못 읽더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친교(親交) 시간에 중·일 학생들은 漢字로 필담(筆談)을 나누는데 우리 학생들은 漢字를 쓸 줄 모르니, 그 춘에서 베도는 수모(受侮)를 겪었다는 것입니다.
그와 아울러 우리 나라 기성(旣成) 세대들이 漢字 문화권을 여행할 때 도로 표지(標識) 등에서 조금도 불편을 느끼지 않는 것과는 역으로, 漢字 문화권 사람들이 서울을 여행할 때는 아랍권에서와 같은 답답함을 느끼는 것에 버금하는 느낌을 우리의 한글 세대가 漢字 문화권에서의 도로 표지에서 역으로 느낄 것을 생각할 때, 1970년 이후 한글 전용 교육 정책의 폐단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실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새 기업체에서는 漢字 문화권과의 경제 문화 교류를 염두에 두고, 漢字를 교육시키며 인사 고과(考課)에도 반영시키고 있습니다. 공교육(公敎育)에서 마땅히 다루었어야 했을 것을 임갈 굴정(臨渴掘井)하도록 한 교육 당국의 우(愚)가 가탄(可歎)스럽습니다.
대부분의 출판사에서는 한글 세대(世代)를 의식하고 원고 청탁시 어려운 말은 풀어 쓰고, 漢字는 꼭 필요할 경우 괄호 속에 넣어 달라는 주문을 합니다. 글이란 것은 내용이며 읽을 대상에 따라 이해가 잘 가도록 쓰는 것이 하나의 상식인데, 이러한 노파심적 주문은 아마도 사전(辭典)을 찾지 않고 읽을 수 있게 써 달라는 뜻이겠습니다. 말하자면 어떠한 글이고 기본 어휘(語彙) 범위에 지적(知的) 수준을 묶어 두자는 것밖에 안 된다는 처사라고 여겨집니다. 사전을 안 찾는 글은 조금도 의문이 안 가도록 해설을 베풀어야 할 것이니 그러한 글은 한 번 눈을 스치면 그뿐, 다시 읽을 매력이 안 날 것입니다.
글은 풍부한 어휘(語彙) 속에서 그 경우에 가장 어울리는 말과 표현을 가려내서 쓰되, 독자의 의문과 상상이 끊임없이 작동될 수 있도록 행간(行間)을 열어 놓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10대, 20대, 3,40대, 5,60대며 7,80대로 인생 경력이 쌓여 갈수록 새로운 것을 느끼어 빈 행간을 독자 스스로 채워 가도록 할 때, 보배로이 간직하고 두고두고 읽고 싶은 매력(魅力)을 느낄 게 아니겠습니까.
글의 성격이나 내용에 따라서는 한글만의 문면(文面)으로 괜찮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높은 수준의 전문 용어 곧 술어(術語)가 중심 어구(中心語句)로 등장할 때, 그것이 한자어(漢字語)일 때는 漢字로 표기하는 것이 문면의 시각 효과가 강화됩니다. 한글만의 문면은 마치 읽는 것이 듣는 것과 같아 소리의 영상(映像)이 비교적 단선적(單線的)으로 잡힐 뿐, 그 내용의 입체적(立體的) 파악이 쉽지 않습니다. 비유컨대 독시야(讀視野)를 손전등으로 글줄을 따라 비치는 것과 같아, 불빛이 스러지면 동시에 지나간 문면은 마치 옴짓옴짓 움직이던 게들이 일제히 모래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리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漢字語로 된 중심 어구를 더욱 효율적으로 정선해서 漢字로 표기해 놓으면, 일단 스쳐간 문면을 일별(一瞥)해도 전체 내용이 한눈에 인상적(印象的)으로 싹 들어오고, 앞으로 읽을 곳도 그 내용이 쉽게 투시(透視)되는 시원함이 있습니다. 한글만의 문면은 눈길이 스쳐갈 때에도 구체물을 얇은 보자기로 한 겹 가리고 그 실체(實體)를 짐작으로 알아맞히는 것과도 같은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일제 강점기(强占期)에는 일인들의 특징을 그리려면 얼굴에 안경을 씌울 만큼 그들에게 근시(近視)가 맣았던 데 비해, 당시의 우리 젊은이들은 미로통 눈이 좋아 조선 사람은 안경이 쓰고 싶어 공부를 한다는 일인들의 빈정거림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양쪽이 비슷하다니 우리가 상대적으로 나빠진 셈입니다. 근시의 원인은 영양이나 환경 등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나는 漢字를 적절히 섞으면 문면이 시원해 대각선(對角線)으로도 그 내용이 쉽게 파악되는 것을 한줄 한줄 보물을 찾듯 읽다 보니 눈의 피로도(疲勞度)가 심해진 탓도 있다고 봅니다. 게다가 요새는 어린이용 인쇄물이 활자 크기를 나이에 따라 조절함이 거의 없어 근시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된 까닭도 있다고 봅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이른바 골라잡기식 시험 공부 까탈에 눈이 나빠졌다고 봅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각 분야의 술어(術語)가 거의 제한 없이 등장이 되는데, 漢字로 표기해야 뜻이 선명하고 인상 깊게 머릿속에 들어가는 술어나 고유명사들을 깡그리 한글로 모래를 뿌리듯 섞어 놓는 데다가, 꼭 무슨 퀴즈로 골탕이라도 먹이려는 듯 자칫 아주 말단적인 데 함정을 파 놓은 오답지(誤答肢) 또는 정답지를 구별하느라 뚫어지게 들여다보다 보니 자연 눈이 나빠질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임진왜란에 관해 원인(遠因)과 직접 동기(動機), 경과, 그리고 결과에 대해 문학적인 측면, 정치적인 측면에 걸쳐 기술(記述)하라면, 내용을 조리 있게 공부하고 문장력도 길러져야 하는 근본이 닦일 것인데, 시험만 끝나면 그뿐 학력이나 일생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는 토막 문제에 매달려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딱딱한 의자에서 고역을 치르고 있으니 눈인들 배겨날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1970년에 느닷없이 실시한 한글 전용 교육 정책과 1960년대부터 실시해 온 선택형 평가법(評價法)은 근본적인 인간성(人間性)의 형성이 없이, 쉽게만 살아가는 데 집착하여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출세하고 돈 버는 데만 급급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고서도 교육의 방침을 근본적으로 고치지 않는 교육 당국은 국운(國運)을 계속 구렁텅이 속으로 몰아갈 작정인지 모르겠습니다.
사서(四書)의 하나인 『대학(大學)』에 이런 구절이 보입니다.
‘물(物)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으며 일에는 마침과 비롯음이 있으니, 먼저 할 것과 뒤에 할 것을 알면 도(道)에 가깝다 하겠다.(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어느 것이 근본이고 어느 것이 말단(末端)인가, 어느 것을 먼저 하고 어느 것을 뒤에 할 것인가를 헤아려야 한다는 『大學』의 지혜가 절실히 요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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