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김제평야
鄭 木 日
가을의 한복판에 이르는 시월엔 혼자라도 김제평야에 오고 싶다.
김제평야 만경평야의 가을은 백제 무렬왕릉에서 출토된 왕관장식의 빛깔이 넘쳐흐른다. 누가 이토록 아름다운 빛깔을 들판 가득 채워 놓았을까.
단풍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과는 달리 황금빛 벼들은 단색이 갖는 깊이와 본질적인 면이 있다. 만산홍엽의 색깔들은 곧 흩어져버릴 것 같이 생각되지만, 벼들이 내는 빛깔은 숭고하고, 바랄 데 없는 완성의 빛깔처럼 느껴진다. 빛깔이 안으로 여물대로 여문 나머지 바깥으로 번져 흐른다. 빛나되 번쩍거리지 않고, 황홀하되 자극하지 않으며, 눈부시되 찬란하지 않다. 소박하고 푸근하게 마음을 밝혀주는 빛이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벼들의 모습은 겸허하고 거룩하다.
순금장식에서 보는 권위와 위엄과는 사뭇 다른 순수와 자비의 빛깔이다. 언덕배기나 밭두렁에 피는 호박꽃의 황금빛깔과도 다르다. 호박꽃은 천진하고 소박한 자태를 보여주지만 익은 벼들에선 결실에서 오는 깊은 광채가 있다. 농부의 손길, 하늘의 마음, 땅의 말이 한데 만나서 빚어낸 감동의 빛깔이 아닐까.
벼들이 뿜어내는 내는 것은 찬미의 빛깔이요, 하늘과 땅과 인간에게 바치는 은총의 빛깔이리라. 하늘이 내려다보고 온화한 미소를 띠게 만들며, 땅이 가슴을 열면서 화답하고 있다. 마음의 평화와 생기를 주는 이 빛깔은 우리 겨레가 소망해온 빛깔이 아닐까.
가을엔 김제에 ‘지평선 축제’가 열린다. 평야에서 맞는 농경 축제다. 우리나라엔 여기 이외에 지평선을 바라볼 수 있는 들판을 구경할 수 없다. 어디로 보나 오밀조밀한 산과 시내가 이어지고, 대지라고 할 만한 곳이 없다. 삼국시대 3대 제방 중의 하나인 ‘백골제’가 있는 곳에 축제가 마련되어 관광객들이 붐빈다.
혼자서 들판 길을 걷는다. 가을 한복판으로 들어가면 하늘의 손길이 느껴진다. 땅의 숨결을 듣는다. 농부들의 땀 냄새와 인고의 세월과 만난다. 벼들의 황금빛은 한꺼번에 채색한 것이 아니다. 폭풍과 가뭄, 뇌성과 번개, 농부들의 기도에서 무르익은 것이다. 고통과 시련의 즙들이 모여 오랜 동안 쓴맛을 가라 앉혀 단맛을 낸듯한 빛깔이 아닌가.
가을 들판에선 벼들처럼 나도 고개를 숙이고 싶다. 논두렁에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절을 드린다. 무엇에든지 경배 드리고 싶은 가을 김제평야-. 들판 가득 넘치는 은혜의 빛 속에서 어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으랴.
벼들이 내는 황금빛엔 경건함과 감화가 있다. 가을 들판은 벼들이 올리는 찬미와 감사의 노래로 가득 차있다. 벼는 가장 연약한 듯하면서도 사나운 폭풍우와 뙤약볕을 잘 견뎌낸다. 황금빛 벼이삭들에선 찰랑찰랑 맑은 종소리가 울려오는 듯하다. 바람에 묻어오는 벼 익는 향기가 감미롭다. 푸른 하늘 속으로 고추잠자리가 유유히 나르고, 그 위로 뭉게구름이 한가롭게 떠간다.
추수가 끝나면 들판도 비워질 것이고, 황금빛은 해체되어 검은빛이 되리라. 모든 생명체는 땅에서 나서 땅으로 돌아가리라. 뭇 생명체가 계절마다 제 빛깔을 낸다면, 인간에게도 빛깔과 향기가 있지 않을까.
문득 내 인생의 빛깔을 생각해 본다. 지금 서 있는 곳은 어디이며, 도대체 무슨 빛깔을 내려고 한 것일까. 내 인생의 태풍과 봄비와 가뭄을 생각해 본다. 노력과 시련도 없이 단번에 남의 눈길을 사로잡으려 화려한 색깔을 탐하여 온 것은 아닐까. 또 남의 흉내를 내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가을의 절정과 완성을 보여주는 김제평야-. 내 인생에도 빛깔의 깊이와 표정이 있을까. 인생의 발견과 삶에서 빚어내는 빛깔을 갖고 싶다. 빛깔엔 색만이 아닌 향기와 소리와 감화가 있어야 한다. 고독과 아픔의 빛깔일지라도 안으로 묵혀서 평온과 감사의 빛깔로 내놓고 싶다.
가을 들판에선 어느 한가진들 빛깔들이 예사롭지 않다. 나무, 열매, 꽃, 풀들이 내놓은 형형색색은 일생의 체험과 깨달음으로 채색한 것이다. 가을 들판의 벼들에서 나는 완성의 빛깔을 본다.
들판에 군데군데 허수아비가 서있다. 나는 지금까지 속이 비어 아무 빛깔도 내지 못한 허수아비가 아닐까. 황금빛이 아닌 무채색일지라도, 나만의 발견과 깨달음의 빛깔을 내고 싶다.
가을의 한복판에 이르는 시월엔 혼자라도 김제평야에 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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