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병(鳥只甁) / 김순재
베란다 화분 틈새에 있던 오지병을 들여놓고 골동품인 양 아낀다. 부산에 내려와 살 때 어머니가 간장을 담아서 갖고 오신 옹기다.
내용물을 다 쓴 후로는 관심을 가져보지 않았다. 셋방살이 적에는 부엌 구석에, 어떤 때는 단지 몇 개와 더불어 마당귀퉁이에, 집을 마련하고는 장독대에서 굴러다니던 쓸모없는 기명이었다. 올케도 지금까지 남아있었지만 골동품은커녕 고물로도 쳐주지 않을 물건이라 버리듯 두었었다.
고물도 골동품도 다 같이 오래되어 낡은 물건이다. 다만 예술품으로서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역사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박물관의 골동품은 이 기준에 의한 것이겠지만, 일반 가정에서 보관하는 골동품은 대게 선대의 생활이 묻은 소소한 물건들이라 할 수 있다.
젊어 한 때는 부모님 손때 묻은 물건 하나 없는 것이 서운했다. 고리짝 두 개 들고 막막한 서울에 떨어져 신혼살림을 차린 나는, 어느 집 선반 위에 놓인 조청 담던 항아리가 부럽고, 벽에 걸린 고서화가 조상 잘 만난 표상처럼 보였다. 어쩌다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이 글씨와 그림은 증조부님이 소장했던 것을 물려받은 것이라든지, 이 장롱은 조모님이 쓰시던 것이었다는 등, 자랑 아닌 자랑을 듣고 올 때면, 공연히 뿌리 없는 나무 같아서 허전했다.
장개석 총통이 국공전쟁에서 패하여 본토에서 대만으로 퇴각하면서 무엇보다 우선으로 중국왕실의 골동품을 가져갔다고 한다. 그 당시 2,000만 대만국민이 장개석박물관 입장료 수입만으로도 일하지 않고 1년을 살 수 있다고 했으니, 그 규모가 어떠한가를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쫓겨 가는 절박한 상황에서 만난을 무릅쓰고 왕실유품을 운송해 온 것이 어찌 먹고 살 일만을 염두에 두었다고 하겠는가. 총통은 아마 국가의 뿌리, 다시 말해 나라의 정통성과 주권을 주장하고 싶었을 것이다.
뿌리 없는 나무가 있으랴. 어제 없는 오늘이 있으랴. 하물며 사람이랴. 돌아보면 선대의 체취 스민 기물이 왜 없을까. 내 아련한 기억 속에는 할아버지의 갓과 목침이 있고, 아버지께서 쓰시던 벼루와 연적, 허리춤에 차고 계시던 침대롱과 패철은 어제같이 또렷하다. 전해 내려오지 못한 것은 눈으로 보이는 잣대의 눈금만을 가늠했을 뿐, 잣대를 댈 수 없는 중요한 가치는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록 선대의 유품이 박물관에 이름이 오를 고귀한 골동품의 반열에 들지 못하는 것일지라도, 비록 누추한 고물일지라도, 거기에는 질박한 삶의 복판에서 한줌 생명을 뜨겁게 꽃피우고 간 나의 소중한 뿌리가 있지 않으랴. 어제가 있지 않으랴. 그것은 곧 내 자신인 것. 김소운 선생은 <목근통신>에서 말했다. “내 어머니는 레프라(문둥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어머니를 클레오파트라와 바꾸지 않겠습니다.”
어머니가 간장을 담아 지푸라기 마개로 구멍을 막고, 헝겊을 덧씌워 꽁꽁 묶어서 갖고 오신 오지병은 진흙으로 빚어 햇볕에 발린 후 오짓물을 입혀서 구워낸 옹기다. 둥글둥글 배부른 항아리 같은 물통에 비해서 목은 가늘고 입은 적당히 크고 넓적하다. 몸통과 목, 입, 어느 것도 좌우 대칭이 맞지 않고, 정교한 맛은 더욱 찾을 수가 없다. 오지물이 제대로 묻지 않아 붉은 속살을 드러낸 곳도 있다. 서민들의 생활옹기 중에서도 하치다. 도공이 부실이 만들었으니 오지병도 무심이다. 그러나 계산하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되려 아름답게 느껴지니 묘하다. 오래 전 이천 도자기전에서 사 온 모란무늬 청자병은 아름다우나 매끄러워서 어렵고, 투박한 오지병은 어느 때고 따뜻하여 만지며 느낀다.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볼록하니 둥근 모양이 미영베(무명) 통치마를 입고 푸성귀 광주리 앞에 앉아서 채소를 파시던 어머니를 닮았다. 치마 홈칠 겨를이 없어 그대로 앉아 푸성귀를 다듬을 때면 치마폭에 바람이 차서 저 모양 옹기였다. 나는 제자리도 없이 굴러다니는 오지병에서 어느 날 문득 어머니를 보았다. 반세기가 훌쩍 넘어간 그때야 미영베 치마폭에 싸여있던 어머니의 우수가 보였다.
글자를 깨치지 못하신 어머니는 ‘오오’가 불면(정오를 알리는 경찰서 사이렌) 장사 손을 놓고, 어김없이 찬거리를 사 들고 동피랑 몬당을 넘어서 집으로 오셨다. 그러고는 가쁜 숨을 내쉬며 아버지 점심을 챙기셨다. 더운 진지, 비린 반찬, 입가심까지.
봄에는 “잡솨보소. 쑥 비짐떡이라예. 벌써 봄 푸새가 나왔는기라.” 했고 가을에는 홍시를 쪼개서 입에 넣어드리며 “요새 파득파득 나오네요.” 라며 치매와 중풍이 겹쳐 누우신 불쌍한 중생에게(어머니는 아버지를 그렇게 불렀다) 그렇게 계절의 변화를 일러주고, 새로 나온 제철 음식을 맛보게 하셨다. 눈 비 내리는 날에도 뙤약볕 타는 날에도 동피랑 까끄막을 오르내리며 그리 돌보셨다. 그러나 정작 아버지는 계절도, 음식 맛도, 어머니와 말씀까지도 잊어버리신 지 오래였다.
배고픈 세상도 많이 사신 어머니, 추운 잠도 많이 자고 가신 어머니. 허리끈에 차고 계시던 회색 빛바랜 주머니에 얼마나 많은 한숨이 드나들었을까. 돌아가신 지 오래되어 모습도 희미하게 떠오르고, 그리운 정도 없어졌으나, 모진 세상사는 참으로 깊이 이해되어 서럽다.
내가 남편의 건설현장을 따라 부산에 잠깐 살 적에 어머니는 아들 그늘에서 지내는 힘없는 노인이셨다. 아마 며느리 몰래 간장 한 번 뜨시느라 가슴이 울렁거렸을 것이다. 통영에서 부산 배를 타고 6시간 뱃멀미, 그리고 부산 달동네 감천동.
사랑은 내리사랑이고, 어머니의 사랑은 조건 없는 무한대라 하지만, 시대를 따라 모정도 변하는 것 같다. 내게는 어머니 같은 무심한 사랑이 없다. 휘황한 문명의 빛을 누리고 살면서도 자식에게 바라고, 서운해 하고, 타산한다. 나도 남편 병구완을 했지만 어머니 같은 무심한 헌신은 주지 못했다.
오래 되었다고 다 골동품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다. 기교가 돋보인다고 골동품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인간사에랴. 내 집 거실에 놓인 오지병은 진흙으로 빚은 서민들의 생활 옹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머니의 무심한 세계가 깃들어 있기에 내게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골동품이다. 어루만져 어머니이듯 느끼고, 그 시절 별빛 같은 눈물을 나누며, 말씀보다 큰 침묵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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