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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된 정원
조순영
이른 아침 새소리에 잠이 깼다.
열려진 창문 사이로 펼쳐진 초록 물결, 아침마다 잠을 깨면서 맛보는 청신함, 조용히 들려오는 새소리 덕에 귀도 눈도 마음도 호사를 누린다. 아침마다 여행지에서 나 느낄 수 있는 신선함을, 도시 한복판에서 느끼는 시골스러움과 이 여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야말로 ‘텅빈 충만’ 이런가!
매미 한 마리가 창에 붙어 안을 들여다 보고 있다.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가 가끔 더듬이를 움직인다. 내 인생에 반 가까이 살아온 삶의 터. 젊은 날 복작거리던 많은 식구들은 제 갈 길을 찾아 가고 올 봄부터 세 식구만 남았다가 추석 때부터는 부부만 남았다. 오래지 않아 재개발에 밀려 우리도 어디론가 새로운 곳으로 떠나야 할 예비 철새다. 반평생을 살아온 집과의 이별의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마을 전체가 재개발을 앞두고 하나 둘 빈집이 늘어간다. 시장도 없어지고 병원도 이사를 가더니 드디어 은행까지 문을 닫았다. 머리를 맞대고 옹기종기 모여 살던 마을사람들이 빠져나간 빈자리가 크다.
우리 집도 다섯 가구 서른 명 정도가 한 울타리 안에 살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위 아래층 2가구에 다섯 명 만이 터를 지키고 있다. 오가는 사람이 뜸한 뜰 안에는 이리저리 딩구는 낙엽만이 가득하다. 마당을 줄기차게 지키던 까만 승용차도 얼마 전에 떠나보냈다. 꽤 시원할 줄 알았는데 눈에 자꾸 밟힌다.
대문을 들어서면 길 양쪽으로 정원석이 나란히 서 있다. 오른쪽으로부터 황매화와 수국 그 옆으로 대봉시와 월화감나무 사이에 청단풍 나무가 있다. 뒤쪽으로 큰아들 대학입학기념으로 그이가 심은 주목나무. 어느 핸가 내가 화개장터에서 사다 심은 매화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다.
공무원 집이라고 남편이 무궁화나무 두 그루를 구해다 심었다. 그늘진 곳에 자리 잡은 나무는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빈약한 몸으로 간신히 자리를 지키고 서있고 또 한 나무는 여름내 두 팔을 벌리고 수많은 꽃이 피고 지며 수문장처럼 대문을 지킨다. 그러고 보면 같은 나무라도 주어진 환경에 따라 성장의 속도나 삶의 모습이 다르지 않은가. 사람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으니 노력하는 사람이 발전하는 것은 자연의 현상이요 이치가 아닐까.
집 안쪽으로 하얀 라일락 향내가 봄내 그윽하고 이웃한 산수유 나무는 겨우내 빨간 열매를 달고 눈 내린 정원을 빛낸다. 거실 앞 창가에는 지붕을 덮는 모과나무가 아직도 청청한 잎을 달고 늠름하게 자리를 지킨다.
그 옆에는 큰 나무에 눌려 고사 직전인 앵두나무가 간신히 숨을 쉬면서 서 있다. 한때는 앵두가 탐스러워서 발길을 멈추곤 했었다.
왼쪽 담 옆에는 몇 년 전에 고사한 마른 백장미 한그루가 아직도 다하지 못한 소임이 아쉬운 듯 앙상하게 가시를 돋우고 있다.
전에 세 살던 사람이 심은 엄나무 한 그루가 해를 거듭하면서 여러 군데로 번져 나갔다. 봄이면 파릇파릇한 순을 따다 살짝 데쳐 된장에 조물조물 무쳐 밥상에 올리면 맛깔스런 반찬이 된다. 사철나무 옆에 산당화 나무가 봄 한철 핏빛 울음을 터뜨린다. 집 모퉁이로 돌아가면 장독대 밑으로 창고가 있고 더 뒤쪽으로 가면 바깥 화장실 두 개와 목욕탕이 나란히 서 있다. 그 위에는 또 다른 장독대가 햇볕을 듬뿍 받고 있다. 장독대에는 빈항아리들이 지나간 날의 영화를 반추하듯이 침묵을 지킨다. 뒤꼍에는 푸른빛을 띤 탄탄한 챙이 뒤란을 지키고 있다. 나는 벽에 박힌 대못에 마늘과 양파 등 겨울 식량을 걸어 갈무리를 한다.
한때는 시원한 동치미와 김장김치를 묻었던 커다란 항아리 세 개가 모과나무 밑에 묻혀있다. 김장을 담그고 짚으로 엮어서 항아리에 옷을 입히면 김장김치는 겨우내 알맞게 익으면서 식구들을 불러 모았었다. 이제는 할 일 잃은 항아리에는 바람소리만 가득하다.
봄이면 겨우내 익은 맑은 간장을 가르면서 어머니와 나의 봄날은 갔다. 파릇파릇한 새싹들과 산수유의 노란 꽃을 따라 하얀 라일락 향기에 취한 옆집 젊은 아낙네가 커피를 들고 마당으로 들어선다. 우리는 평상에 앉아서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다. 어느새 담 옆에는 잎사귀도 없는 분홍 상사화꽃이 높은 꽃대를 세우고 소녀처럼 수줍게 웃는다.
초여름이면 꽃 중의 꽃이요 부귀의 상징인 자주색 모란꽃이 탐스럽게 피고, 여름이 깊어 갈수록 옥잠화 향기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분홍색 꽃잎에 자주색 꽃방 사이에 노르스름한 꽃술을 한가운데에 단 무궁화꽃이 활짝 핀다. 가을이면 청홍 단풍이 아름답게 제 색깔을 나타날 때 쯤 상강이 지난 후 감의 수확을 마쳤다. 젊을 때 장대를 휘휘 저으며 힘든 줄 모르고 따던 감을 올해는 미루고 또 미루다가 아들네 가족과 함께 땄다. 삼둥이가 힘을 모으니 한결 수월했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게 다 때가 있는 법인가 보다. 어느새 겨울정원은 적막속에 잠들고 있다. 오래지 않아 눈 덮인 정원은 해마다 오는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할 것이다.
나는 사계절 중 겨울정원을 가장 사랑한다. 창문으로 보이는 아무도 밟지 않은 정원을 바라보는 즐거움은 어디에도 비할 바 없이 크다. 눈이 오면 빨간 산수유 열매는 흰 눈 속에서 기쁨을 선사할 것이다.
지금은 초겨울. 아마도 이번 겨울이 이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겨울이 될 지도 모른다. 오래 정든 친구들도 어디론가 새둥지를 찾아 떠나가리라 생각하면 아쉬움에 가슴만 서늘해진다. 하얀 한복을 입고 허연 수염을 날리며 넉넉한 웃음을 선사한 전주인은 어디로 갔을까. 별이 총총한 세계로 떠나갔을까. 아니면 양지바른 터에 잠들고 있을까.
집을 산지 3년 만에 천년만년 살 것처럼 튼튼하게 집을 지어 30년이 넘도록 곰삭은 정으로 살아왔는데 또다시 이사를 앞두고 있는 마음이 아쉬움만 가득하다. 손자 넷이 재잘대며 마당으로 들어올 것만 같아 시선은 대문간에 머문다.
2015년 .12월
주: 가르다: 간장과 된장을 분리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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