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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논두렁에서 쓴 편지
鄭 木 日
농부가 아니더라도 여름 들판 속으로 가보고 싶어진다.
여름 들판과 처음 만난 것은 1950년 진주시(당시 진양군) 집현면 냉정리라는 곳이다.
6.25전쟁이 터지자, 외갓집이 있는 이곳으로 우리 식구는 피난을 갔다.
전쟁 중이었지만 여섯 살배기인 나는 들판에 나가서 메뚜기를 잡으며, 논두렁을 쏘다니곤 했다.
그 때 처음 보고 체험한 들판은 마음속에 남아 발길을 끌어당기게 하는가 보다.
뜨거운 태양과 귀가 따가운 매미 소리, 논에 펼쳐진 벼,
소 먹이러 갔다가 소를 놓쳐버리고 울던 기억들이 한 장의 수채화를 이루고 있다.
전쟁 중이라도 농부들은 논에 나가 김을 매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논두렁에 앉아 논을 바라본다. 논은 어머니의 자궁 같다.
생명을 잉태시키는 거룩한 생명의 자궁이다.
사람은 어머니 자궁의 양수 속에 있다가 출생한다.
사람이 죽으면 황천으로 간다는 말을 한다.
양수와 황천은 모두 ‘노란 물’이며, 인간은 노란 물에서 나와, 노란 물로 돌아가는 셈이다.
‘노란 물’은 생명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암시해 준다.
논은 누른 황토 물로 차 있으며 이 속에서 벼가 자란다.
논의 구조는 흙과 물로써 이뤄져 있다.
이 논에서 인류 절반이 양식으로 삼아온 쌀이 생산되고 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논은 인간을 기르고 농경문화를 낳은 어머니이다.
여름의 햇살은 살갗을 태울 듯 뜨겁기만 하다.
논의 흙과 물과 햇빛으로 인류를 먹여 살리는 벼들이 자라는 숨소리-.
벼들이 물을 머금고 햇빛을 빨아들여 얻어내는 이 놀라운 생명의 신비, 광합성의 경이를 보면,
감탄을 쏟지 않을 수 없다. 이보다 더 위대한 자연의 은총이 어디 있을까.
논은 생명의 속살과 피로 돼있는 게 아닐까.
논두렁으로 둘러싸인 논들이 마치 유전자지도처럼 보인다.
이 논에서, 인류는 위대한 생명의 섭리를 터득했으며, 평화와 안정을 취하게 되었다.
농경정착문화를 꽃피우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수 있었다.
가장 연약하고 부드러운 벼가 뙤약볕과 태풍을 이겨내는 모습은
인간이 살아갈 자세를 가르쳐 준다.
논농사의 위대함이란 생명의 신비를 깨닫게 됨과 그 오묘한 이치를 삶속으로 끌어들인 데 있다.
여름 들판에 서면 흙과 물의 말을 듣는 시간이 있다.
햇빛의 말을 듣는 시간이 있다. 텅 빈 논엔 침묵과 인내의 표정이 보인다.
농부들이 논을 갈아 물을 채워놓은 모습,
고여 있는 흙탕물이 농부의 얼굴처럼 누르스레하고 구수하다.
벼가 자라는 논이어야 생명이 넘치고 편안해진다.
개구리소리가 들리고 소금쟁이가 뜨고 왜가리가 찾아온다.
여름 논은 생명의 열기로 가득 차 있다.
만삭이 된 임산부처럼 포만감을 보여준다.
근래엔 농부들이 모여서 모심기를 하지 않는다.
서늘한 아침나절을 이용해 모가 실린 이앙기가 지나가면 모심기가 끝나고 만다.
모심기는 논농사의 시작이다. 이때부터 농부는 들판에다 온통 눈을 주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벼는 농부들의 발자국 소리로 자라고, 농부들의 숨소리와 땀으로 성장한다.
농부는 아기를 키우는 정성으로 벼를 심으며 초록빛 생명의 사랑 법으로 이 땅을 지켜낸다.
벼는 인간이 기르기 시작한 가장 오래 된 식물의 하나다.
<삼국유사>에 백제와 신라의 벼농사 기록이 남아 있고,
3000여 년 지난 것으로 추정되는 불에 탄 볍씨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농경시대의 논은 인간의 생명 줄, 꿈의 저장소, 삶의 근원이었다.
이보다 더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터전이 없었다.
논의 물은 홍수를 막아주고, 공기를 정화하고, 기온을 조절해 준다.
논이 차츰 없어지고 시멘트 공간이 확대됨에 따라
빗물은 온전히 땅에 스며들지 못하고 증발하고 만다.
밭에서도 비닐을 이용한 작물 재배로 빗물이 땅에 스며들 여지가 없어지고 있다.
땅이 적당한 물기를 머금어야만 생명을 잉태할 수 있으려만,
논도 차츰 줄어들고 물을 가두어 둘 곳이 사라지고 있다.
물기 없는 땅은 생명을 포기하고 사막화를 자초하게 만든다.
도로 확장으로, 도시화로 인해 점점 줄어드는 논,
인간의 편리를 위해서 생태계의 환경이 파괴되는 것을 망각해선 안 된다.
쌀 수입에만 의존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 땅과 환경을 보전하기 위해 물을 채워놓을 논이 필요하다는 데 있다.
논은 홍수 조절과 아울러 가뭄을 막을 수 있는 역할을 해준다.
차츰 줄어드는 벼 농경지를 보면서 논의 무한한 은총을 생각한다.
논의 위대한 생명력과 사랑을 메마르게 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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