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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옵니다
한흑구
비가 옵니다.
어두운 새벽부터 시작해서 동이 트고, 날이 새었는데도, 비는 고요히 소리 없이 내립니다.
창을 열고 내다보시오.
키가 큰 포플러, 그 새파란 은행나무, 손바닥같이 넓게 편 무화과 이파리들.
모두 입을 벌리고, 비를 마시고, 비를 내뿜습니다.
늘어질 대로 늘어진 수양버들, 맑게 푸르게 머리를 감습니다.
등나무도 새로 나온 새말간 순들을 머리 위레 이고 있습니다.
지금 저 빗속에서도 쭉쭉 뻗어서 기어 나오는 것 같습니다.
담 안에 서 있는 향나무도, 머리 끝에 새잎들이 나와서, 두 색으로 되어 있습니다.
밤새의 비에 저렇게 새잎들이 나왔습니다.
비가 옵니다.
참 좋은 빕니다.
삽을 메고 들로 나가 보시오.
보리 수염들이 파랗게 버티고 서서 은구슬 같은 빗방울들을 하나하나 줄줄이 꿰고 있습니다.
갓난이이의 손가락 끝같이, 보리알들이 통통 불어있지 않습니까?
저 산들을 바라보시오.
둘러서 있는 산 밑에는 안개 속에 하얀 아카시아꽃들이 흰 구름같이 뭉켜 있습니다.
아무리 부지런한 벌들도 오늘은 다 쉬고 있을 겝니다.
내일 해가 빤짝 날 때에 두 곱이나 일하기 위해서, 비 오는 오늘은 다 쉬고 있을 겝니다.
저 언덕 위에는 능쟁이(명아주)풀들이 파랗게 잎을 벌리고 있습니다.
가을이 오면 먼저 붉은 능쟁이 이파리들이, 지금은 이 빗속에서 저렇게 파랗습니다.
발자국 하나 없는 들길을 빗속에서 맨발로 혼자 거니는 것도 참 유쾌한 것입니다.
비 오는 길 위에는 아무 자국도, 흔적 없습니다.
새 길입니다.
더러운 개똥도 다 씻겨 나가고, 다 흘려 나갓씁니다.
이러한 새 길을 비를 맞으면서 맨발로 걸어 나가는 것도 참으로 좋습니다.
마음속까지 시원합니다.
비가 옵니다.
참 좋은 빕니다.
아랫목에서는 애들이 낮잠을 자고 있습니다.
소곤거리는 빗소리도 듣지 못하고 낮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들도 다 빗속에서, 잠 속에서 뼈가 굵어지고, 살이 부풀어오를 겝니다.
저 포도순같이 뻗어나고 자랄 겝니다.
처마 끝에서는 물방울이 뭉치고 커져서 ‘똑’하고 떨어집니다.
한 방울씩 괸 물위에 떨어져서 물거품을 짓습니다.
동그란 물거품들이 떠내려갈 사이도 없이 터져 버립니다.
누가, 어느 철하자가, 어느 시인이, 인생을 저 물거품 같다고 했습니까?
너무도 허무한 얘깁니다.
얼토당토않은 말입니다.
하나의 찰나에서 무한한 영겁을 안을 수 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하루라도 참되게, 착하게, 아름답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인생이라고 하겠습니까?
바가 옵니다.
참 좋은 빕니다.
춥고, 어둡고, 짓궂게 비 오는 날에, 모든 생명이 솟아납니다. 뻗어 나고, 자라납니다.
발자국 하나도 없는, 비 오는 길 위를 맨발로 한 번 걸어 보시오.
마음속까지도 시원할 겝니다.
(19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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