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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엔 꽃을 산다
김 순 재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포도 위에 떨어진 은행잎이 수 많은 행인의 구둣발에 밟힌다. 은행잎은 흩날려 쌓이고, 또 밟혀서 부서지고. 쏴 가슴에 바람 이는 소리를 들으며 버스를 기다린다.
덜커덕 내 앞에 서는 버스를 분별없이 타버린 바람에 한 참이 걸려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날씨 분위기에 꽤나 빠져있었나 보다. 버스에서 내려 지하도로 들어갔다. 상가들이 즐비하다. 나는 꽃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조명발을 받은 꽃들은 하나 같이 풋풋하고 아름답다. 세계 각국의 꽃이 다 모인 것처럼 종류도 많다. 화사하게 잡아 끄는 꽃들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나비처럼 즐긴다. 그러다가 문득 꽃가게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탄력을 잃고 주저앉은 퍼머머리, 주름져 처진 얼굴, 생기 없는 매무새, 납작한 구두. 배경과 피사체가 따로 논다. .
늙어 간다는 것은 참 슬프다. 어떤 고상한 의미를 붙이고 미화할지라도 늙는 것은 슬프다. 나는 죽음보다 늙음이 더 슬플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죽음은 끝이지만 늙음은 진행되는 상실이니까. 육체와 정신, 존재의 의미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것이니까. 육체를 의미 있게 하던 것들은 상실을 거듭하고 있는데 의식만이 명료하게 남아서 그것을 지켜보는 것은 비애다.
갑자기 나는 꽃이고 싶어졌다. 싱그러운 꽃, 아름다운 꽃,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꽃, 사랑을 주고 받는 꽃. 그런 꽃이고 싶어졌다. 풋사랑 소녀의 꿈이 고이고, 쓸쓸한 병실 창가에서 줄기찬 생명을 피워내며, 소년의 한 방울 눈물을 받아주는 꽃이고 싶어졌다. 나그네 발 밑에서 쌩긋 웃는 작은 꽃, 벌새가 입 맞추는 수풀 덤에 숨은 꽃, 누구에게 의미가 되어 주고 의미가 되어 있는, 그런 꽃이고 싶어졌다.
그 동경이 꽃을 사게 했다. 집에 가져가 꽂아놓고 볼 의도는 없다. 줄 대상은 더욱 없다. 동경, 동경이 꽃을 사게 했다.
꽃을 고르면서 조금 후에 만날 수필서클 회원들을 생각했다. 그 중에서도 지도 교수님과 윤옥희씨를 더 많이 생각했다. 황혼을 함께 가는 연대감 때문일 것이다. 비를 무릅쓰고 일산에서 수원까지 오실 선생님이 감사했다. 대전서 열차를 타고 수원까지 오는 윤옥희씨도 오늘 같은 날은 더욱 반갑다. 노을빛으로 물들어가는 두 분을 위로하고 싶었다. 따라서 나도 함께. 날씨보다 밝게 서클 분위기도 띄우고 싶었다. 재치도 없고, 미색도 아니며, 싱싱하지도 않은 나를 대신하여 어여쁜 꽃이 그런 역할을 해주길 바랬다.
꽃을 고르고 사는 동안 내가 꽃이 된 것처럼 명랑했다. 가게 주인에게 이 꽃 저 꽃 이름을 물어보고, 꽃의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내고, 처음 보는 품종에는 더더욱 감탄사를 날리고. 가게 주인은 자기가 칭찬을 듣는 것처럼 기분 좋아했다. 나는 꽃다발을 들고 서클로 들어서기까지 무척 행복했다. 이러한 짧은 순간의 영악하지 못한 행복을 전에도 여러 번 맛 보았을 것이다. 오늘 그 행복들을 다 기억해 낼 수는 없지만 내 잠재의식은 기억하고 있다가 꽃이고 싶어진 내 곁에서 꽃을 사도록 충동질했을 것이다. 그리고 깜짝 사이에 우울의 터널을 빠져 나오게 했을 것이다.
내 나이 스물 아홉 마지막 날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생소한 충격이었다. 생기 발랄한 꽃이며, 팔팔한 날개인 나, 정오의 태양처럼 높게 떠 있는 나. 그것은 영원이 내가 갖고 있을 내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날, 그 분기점에서 맞닥뜨린 것은 당연히 내 것인 것을 ‘네 것이 아니다’라며 빼앗아간, 어떤 항거 할 수 없는 힘에 대한 낯선 감정의 통증이었다. 내 생애 가장 그리운 나이 스물아홉. 아프면서도 빛나던 나이. 그 마지막 날에도 나는 한 아름 꽃을 샀다.
이와 같은 부질없는 꽃 사기는 30지나 40을 맞고, 50을 보내고…. 세월을 사는 통증이 가슴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저질러지곤 했다. 처음으로 돋보기를 맞추던 날은 스물아홉의 마지막 날과는 또 다른 충격이 나를 박살냈다. 그날도 나는 꽃을 샀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비수 같은 슬픔이 명치에 꽂혀있던 수 많은 날에도 나는 꽃을 샀다. 꽃이 외로움이나 당황함에 직면한 나를 구원해주지는 않지만, 고르고, 사고, 손에 들고 오는 동안은 환각에 빠진 듯 위로가 되었다. 좋은 시절이었던 젊은 날에도 한 푼이라도 적게 들이려고 장바닥을 누비는 억척스런 내 모습이 애달파서 꽃을 사기도 했었다. 지금도 시장을 돌다가 아득히 외로움이 피어 오르면 꽃이 사고 싶어진다. 벌거벗은 삶의 몸뚱어리가 뒹구는 시장 한복판에서 왜 고독을 느끼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아마 삶의 실체를 연민하는 것일 거다. 그럴 때면 나는 갈증을 축이듯 꽃을 산다. 장바구니에 꽃을 담아오는 날은, 두고 온 세월이 함께 따라온다. 호수 같은 고향 바다와 등대와 교회당 종소리가 따라 온다. 오빠루 치마자락 나부끼며 걷던 토성고개길이 눈부시게 그리워진다. 지나가는 버스 유리창 너머로 추억 속의 소년과 마주치는 우연을 꿈꾼다. 꽃을 사서 장바구니에 담고, 찻길을 건너, 학교를 지나, 집으로 오는 동안, 나는 아련한 세월 속에서 사는 것이다. 화사한 시간을 사는 것이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 덧 입힐 수 없는 상실감, 늙어간다는 슬픔은 그런 것일 거다. 순간의 자극이라도 받지 않으면 힘겨운 세월이다. 젊은 날에는 무리한 등산을 하고 일을 했어도 하룻밤 단잠이면 거뜬했다. 슬픔이나 좌절도 하룻밤 단잠으로 풀어지는 피곤과 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탄력을 잃어버린 세월은 억지라도 자극을 만들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다. 내게 아직 꽃을 사는 사치한 감정이 남아있음은 얼마나 다행인가.
푸르던 나뭇잎이 낙엽으로 물들고, 꽃이 시들어 떨어지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듯, 늙음도 거부할 수 없는 순리이다. 서러워하거나 허무해 할 것은 없다. 젊은 날이라고 환희만 있었던가. 이제와 청춘이 행복인 것은, 그 시절의 상처는 잊어버리고 아름다운 추억만이 남아 있음이다. 그렇듯 황혼이 결코 무의미하거나 쓸쓸한 것만은 아니다. 다만 지금 나는 고독의 미각이 더 우세한 인생의 어느 간이역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앞으로 지나갈 또 다른 역에서는 오늘이 아름다운 날로 그리우리라. 천형의 문둥이 한하운이 ‘인간의 애환이 다시금 아름다워 스스로 나의 통곡이 흐느껴진다.’라고 했듯이.
그러나 낙엽 흩날리는 11월의 오늘 같은 날엔, 박정한 세월의 비애가 쓰디쓰게 씹히는 어느 날엔, 꽃이라도 사서 세월을 사는 고독을 희석시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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