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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잔술, 한 모금의 차
이 일 헌
나이 탓일까, 벗이 있어 ‘술 한잔 합시다’ 하면 은근히 기분 좋던 이 말이
언제부터인가 그저 그렇게 들린다. 이제는 양도 줄고 종류도 가려 포도주 한두 잔을 넘지 못한다. 가끔씩 커다란 맥주잔을 잡고 상쾌하게 마시던
술, 하얀 거품의 유혹을 떨치지 않을 수 없다.
고량진미로써 배를 채우고,
차와 술로써 정신을 맑게 할도……’
(膏粱以充腸 茶酒以淸神 ……)
신라 설총이 신문왕의 자문역을 맡았을 때,
임금이 지켜야 할 계율을 지은「花王戒」의 한 구절이다. 머리를 맑고 차분하게 하는 차, 생각을 흐리고 기분을 드솟게 하는 술, 이렇듯 성질이
사뭇 다른 두 마실 거리가 정신을 맑히는 음식물로 짝을 이루어 흥미롭다. 내 가까이 늘 차와 술이 있었기에 더 관심이 간다.
16년 전, 우연히 차를 만나게 되었다. 연한 녹색의 차 두서너 잔이 마치 생명의 물인 듯, 그 오묘한 맛에 반했다. 고려 말,
집안에 매란송죽을 심고 사슴과 학을 벗하며, 손 오면 술자리 찻자리에 시 읊으며 살다 간 이상국((李相國)이나, 물맛의 감별에 뛰어났던
이행(李行) 같은 경지는 언감생심이다. 하지만 차를 소중히 여기고 덕을 담는 그릇으로까지 의미를 부여한 선인들의 혜안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나의 삶에 차를 만난 것은 행운이다. 하지만 젊은 날부터 멀리하지 않았던 술도 어찌 이와 다르랴.
사실 애주가랄 것은 못 된다.
가끔씩 드는 술, 맥주가 좋았다. 주량보다는 분위기에 더 취해 두서너 잔이면 족했다. 달 밝은 밤이나 첫눈 내리는 날, 어찌 한 모금의 차
생각이 없으랴만 한잔 술이 더 제격이다. 아이들이 대학의 높은 문턱을 넘던 날에도,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텅 빈 가슴을 가누지 못하던
그때에도 남편과 마주앉아 만감 어린 술잔을 비우기도 하였다. 또한 뜻 맞는 벗들과 주흥이 무르익으면 시정(詩情)에 겨워 옛 문사들의 풍류도
부럽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왠지 반 컵의 맥주도 부담스럽다. 마음은 아니지만 몸이 어쩔 수 없어 안타깝다. 저 쌉싸래하고
상쾌한 황금빛 액체로, 나는 이따금씩 머리를 식히고 가슴속의 통증을 씻어 내리지 않았던가. 저것의 부추김으로 하여 때로는 새로운 용기와 자신감을
얻지 않았던가. 소심하고 주변머리 없는 내게 차와 술이 함께 하였기에 어설프게 놓인 징검다리 같았던 세월을 그런 대로 견디어왔는지도 모른다.
두 마실 거리가 어우러진 글은「화왕계」뿐 아니다. 고려나 조선시대에 남겨진 글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신라 화랑들의 차
유적지로 알려진 강릉 한송정에서 고려인 김극기는 이렇게 읊었다.
여기가 네 신선이
유람하던 곳
지금도 남은 자취 참으로
기이하여라
주대(酒臺)는 기울어 풀 속에
묻혔고
다조(茶竈)는 나딩굴어 이끼 끼었구나
또한, 술꾼으로 이름난 이규보가
노규선사에게 보낸 시 중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스님께 봄술 빚기 원하니 어찌
잘못이리요
차의 참맛 알기 위해 먼저 술에 취해야 한다오.
그럼에도 차와 술이
서로 흔쾌히 넘나들기가 그리 쉽지 않은가 보다. 지난 세모, 남녀 스무남이 모인 차벗들의 송년 모임에서다. 가벼운 다식과 두서너 잔의 차를
음미하며 다담을 나누다가 헤어졌다. 차분한 분위기가 괜찮았지만 어쩐지 돌아서는 기분이 뒤울리지 않은 것은 나 혼자뿐이었을까. 대체로 술에 전
사람들이 차를 너무 가벼이 여기는 것 같았지만, 차에 치우친 이들도 술의 진가를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중국 당나라 때 왕부가
지은「주다론(酒茶論)」에는 의인화된 차와 술이 맞서고 있다. 서로 뽐내며 상대방의 허물을 들추어낸다. 이를테면 차가
말하기를,
“나는 귀족 제왕들과 함께 한 평생 영예를 누리는 존귀한 신분, 명승의 설법에 힘을 더해주고, 부처님께 공물로도 쓰이지
않는가. 나를 마시고 마음이 흔들린 예가 없다. 술, 너 주정뱅이는 주먹을 휘두르고 행패를 부려 가정을 파괴하고 사음을 돋우는 대악인이다···
··· ” 라고. 술 또한 할 말이 없으랴.
군신이 화합하는 것도 나의 덕이요, 귀인 고관이 마시는 것이며, 술 한
잔은 건강의 근원이고 기분을 전환하며, 인물을 만들고 예의를 가르치며 또 궁중의 음악은 술에서 생긴 것이다. 차, 당신은 다섯 잔에
삼문(三文)의 값싼 것, 윗병을 일으키기도 하고 아무리 마셔도 관현의 가락과는 무관해 노래와 춤도 나오지 않으며···
···.”
논쟁은 끝이 없다. 결국 물이 나섰다. 물이 없으면 차도 술도 형태가 없다는 것을
내세우며, 잘난 척하는 저들의 말문을 닫게 한다.
차와 술의 주장들은 틀린 말이 아니다. 카페인과 알코올의 특성상
언제나 시빗거리가 될 만하다. 그런데 둘의 공통점은, 육체의 배를 채우기 위한 다른 음식과는 달리,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는 중추신경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그래서 알맞게 마시면 정신건강에 좋은 약이다. 이 두 음료가 정신을 맑힌다함은 맞는 말이다. 또 지나치면 무엇이든 독이 되는
법, 하지만 그 공과(功過)가 어찌 차와 술에 있으랴. 저것들은 매개체다. 그저 차이고 술일 뿐, 그에 의미를 부여하고 운용하는 것은 사람이
아닌가.
어느 신문 1면에 실린 글이다. ‘酒黨 코리안’, 우리나라 술 소비 증가율이 세계 톱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대부분 국가들의 알코올 소비량은 줄어드는데, 한국은 큰 폭으로 증가한다고 한다. 격동하는 사회에서 떠안아야 하는 고독과 불안을 오직 술에만 기댄
탓일까. 요즈음은 차 한 잔에 술 백 잔 꼴이다. 이 불균형은 어지럽고 혼탁한 지금의 세태와 모종의 관계가 있을
법하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 술이 없다면, 사연 많고 곡절 많은 인생살이를 무엇으로
갈이질할 수 있을까. 또 그런 곳에 사람 사는 멋이 있을까. 술 한말에 시 백수를 지었다는 이태백도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망우군(忘憂君)’이나 ‘곡다(穀茶)’ ‘반야탕(般若湯)’ 등의 재미나는 별칭도, 고생을 함께한 아내 ‘조강지처(糟糠之妻)’, 큰 바가지의 술을
나누어 마시며 일심동체를 다짐하던 ‘대포지교(大匏之交)’ 같은 뜻 깊고 멋스러운 어휘도 없을 것이다.
기쁘거나 슬플 때 즐겨 찾는
차와 술, 약이고 제물이며 예도(禮道)의 마당에서도 한 몫씩 하는 두 마실 거리, 우열을 논함은 부질없는 짓이다. 어찌 서로 따로 놀며 어기댈
수 있으랴. 술의 열기는 차가 가라앉혀야 하고, 차의 냉기는 술이 거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음을 다스리고 정을 나누는 한잔 술, 한 모금의
차, 가늠하여 즐긴다면 우리 삶에 말 그대로 묘약임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쉽다.
황금빛 술잔이 점점 나를 떠나간다. 이제 내게는 차 백 잔에 술 한 잔이다. ‘사람 사는 멋’ 같은 것일랑 저리 두고라도, 세월이 갈수록 자꾸만
움츠러드는 가슴을 술기운에 등대어 펴 보고 싶은데. 이 시끌벅적한 세상을 조금은 취한 채 바라보고 싶기도 한데
……. (1996년)
창작수필 2006. 가을
국회보 2002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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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sop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3-03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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