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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청음역(可廳音域)
- 만해마을에서
鄭 木 日
오월 어느 날, 만해마을에 갔다. 자정까지 술 마시고 취해 잠들었다.
문득 종소리에 깨어났다. 여기서 백담사는 마을버스를 타고 30분 쯤 가는 거리인데,
종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려온다.
‘덩― ’ 울린다. ‘덩― ’ 말한다. ‘덩― ’ 생각에 빠져버린다. 음색이 맑지 않다. ‘별로구나’ 생각한다.
음파가 길지 않고 마음에 닿아오지 않는다. 은은히 다가오는 그리움의 여운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눈을 감은 채 속으로 투정한다. 여운 없이 끊어지는 것이 서운하다.
저음이고 밑바닥에서 울리는 소리다. 종소리 끝날 즈음, 마음이 더 당긴다.
침묵 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나서 종을 치는가 보다.
한 종소리가 끝나고 다시 울릴 때까지 침묵의 간격이 아름답다.
산이 눈을 뜰 시각인 듯싶다. 만해마을 곁으로 흐르는 북천(北川)이 눈을 뜰 시각이다.
냇물은 한 순간인들 잠잘 수 있으랴 싶다.
그래도 아무도 보지 않는 한밤중엔 눈을 감은 채 소리만 내는지 모른다.
산속에 있는 초목들과 새, 짐승, 곤충들은 귀가 맑다.
종소리 한 번으로 귀가 열려서 마음속으로 응답하고 있다. 나도 무슨 답을 해야 할텐데…,
종소리 사라진다. 비가청음역으로 가버린 것인가.
뒤이어 목탁소리 들린다. ‘톡톡―’ 어둠 속에서 두드린다.
나무 속에서 목탁이 울린다. 나무 넋의 울림인가. 나무들의 귀가 열린다.
산의 만년 침묵이 ‘톡톡―’ 울린다. 청아롭다. 소리가 백담사 계곡만큼 깊고 맑다.
두드려서 무엇을 깨우는 것일까. 같은 종, 같은 목탁일지라도 치는 사람에 따라서 소리도 다를 것이다.
끝일까. 목탁소리 끝을 받아 법고가 울리고 법고의 여운을 다시 운판이 받고
운판의 마지막 소리에 이어 목어의 소리가 이어질 것인데, 들리지 않는다.
나는 늦게 일어나는 편이다. 백담사 종소리의 음역에 있으므로 이른 새벽에 일어난다.
바깥으로 나간다. 안개가 면사포를 쓰고 흐른다.
종소리 목탁소리 다 그친 후, 안개 속으로 물소리가 흐른다.
나는 종소리 여음이 혹시 신록이나 풀숲, 모래밭에 있지 않나 살핀다.
안개가 흐르고 물이 흐른다. 안개 걷힌 하늘에 구름도 흐른다.
안개, 구름, 내(川)는 모두 물의 속성을 지닌 것으로 서로 호응하고 있다.
나도 안개이고 구름이고 물이다. 한 번 울린 종소리이다.
종소리의 여음이 없는 게 아니라 내 인생의 여음이 없음을 알 듯하다.
내를 건너 솔밭으로 들어간다. 숲 속으로 걸어간다.
나무 위에서 모습은 보여주지 않고 까마귀가 ‘까욱― 까욱―’ 한다.
인사인가. 말을 건넨다. 처음 보는 데 무슨 볼일이냐고 묻는 듯. 그냥 “까욱―까욱―‘ 까마귀 흉내로 답한다.
까마귀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새들이 지저귀인다.
노래 아니다. 신호음이고 말소리다. 떠들썩하다.
애교 띤 음성이 있고, 간들어진 음색도 섞여있다. 세상은 빛보다 먼저 소리로 잠을 깨는가보다.
만해마을 북천 곁의 숲에서 새벽을 본다. ‘님의 침묵’을 읊은 만해를 생각한다.
만해(萬海) 한용운은 평생을 참선과 수도로 궁극의 문앞에 서길 원했다.
깨달음의 문을 열어젖히길 소망했다. 자신만의 깨달음과 대자유를 얻으려는 게 아니었다.
님과 함께 얻길 원했다. 혼자 득도(得道)하여 행복하려는 게 아니었다. 민족과 중생과 함께 얻길 바랐다.
종소리 목탁소리는 안개 속으로 사라진 것인가.
가청음역 바깥으로 지금도 울려가고 있는 중인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허공 중에 귀를 대고 들어본다.
귀가 열리지 않는다. 내 귀가 멀어 가는 중인가 보다.
어떻게 마음의 귀를 열 수 있을까.
‘님의 침묵’이 들려오는 듯한 만해마을. 물소리를 따라가 본다.
물에 씻어낸들 마음의 귀가 열릴 것인가. 귀를 밝혀라. 마음의 문을 열어라.
무엇 때문에 자물쇠를 잠그고 있는가.
만해마을과 백담사는 깨달음이 있는 침묵 공간이자 득음을 위한 가청영역인 듯하다.
내 마음만 비가청음역임을 알아차린다. 눈 멀고 귀가 먼 것을 깨닫는다.
내 인생이 적막하다. 풀벌레만도 못하구나.
풀숲에 곤충의 촉각 하나 얻어 귀를 열까.
어디선가 깨달음의 음계를 지나 종소리가 여음일 듯 환청일 듯 다가온다.
안개 속의 물소리처럼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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