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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같은 그림
-박수근의 45주기 기념전을 보고
鄭 木 日
박수근 화가의 45주기 기념전이 ‘겔러리 현대’에서 개최된다는 것을 알고, 40여 점을 한 공간에서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2010년 5월 14일, 인사동에서 걸어서 경북궁 옆길을 끼고 조금 들어가면 되는 전시장으로 갔다.
박수근의 작품들을 보면, 좋은 수필들을 읽는 느낌이 든다. 맑고 정갈하다. 표정이 고요하고 소박하다. 작품들이 소품 위주이며 회색의 화면은 화강암에 양각이나 음각으로 새겨 놓은 놓은 듯하다. 화면 속에서 달빛이 뿜어 나오는 것일까. 그림 밑바탕의 빛깔이 흰 무명옷처럼 소박하기 그지없는 데도 눈물을 흘리고 났을 때처럼 마음이 맑아진다.
아기를 등에 업은 어머니, 생필품을 팔고 있는 노점의 여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무명 저고리 치마 차림에다 흰 수건을 머리에 쓴 여인네들이다.
우리 민족의 삶이 가장 고단하고 고통스러웠던 일제 암흑기, 6.25전쟁으로 암담하고 참담하던 때의 서민들의 삶을 그려 놓았다. 아이들을 비롯한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거리로 나온 여인상은 당시의 우리 어머니요, 이웃 아주머니의 모습이다.
삶의 뿌리가 뽑혀진 현실 속에서 나목(裸木) 아래로 행상을 나가는 여인상에서 시대의 아픔과 한숨이 우러나오고 있다. 아기를 키우는 어머니들은 절대로 낙망하거나 삶을 포기할 수 없다. 얼굴에서 착함과 성실함이 깃들어 있다. 맑고 순박한 표정을 지니고 있다.
가족이 있는 풍경은 편안하고 정겹다. 인간의 선함을 믿는 박수근 화가의 삶과 시선이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눈빛이 다감하고 따스한 이웃집 아저씨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파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귀여운 당신을 내 아내로 맞이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겠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꿈꾸어 오던 내 아내에 대한 여성상은 당신과 같이 소박하고 순진하고 고전미를 지닌 여성이었는데 당신을 꼭 나의 배필로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박수근이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글의 일부이다. 그는 가난했지만, 맑고 착한 품성을 타고 난 사람이다. 맑음의 샘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어서 표정이 풀꽃처럼 편안했다. 그림을 그리는 이외엔 달리 욕심이 없었다. 어렵게 모은 돈으로 간신이 마련한 서울 창신동 집에서 아내, 딸과 살아가던 화가의 표정은 평온했다. 방 하나를 세 주고, 단칸방에서 생활하면서도 화가는 아내에게 다정한 남편, 자녀들에게는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박수근은 평생 서민으로 가난하게 살았지만, 꿈과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가 그린 집들은 기와집이 아닌, 초갓집과 판잣집들이다. 박수근은 나무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가 그린 나무들은 거의 나목(裸木)이다. 벌거숭이에 불과하지만,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나무이다. 그는 나목과 아기를 업고 행상을 나가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희망과 사랑을 보았다.
박수근의 그림을 보면 여명 빛이 은은히 퍼져 나오고 있다. 아침의 햇살이 밝아오고 있다. 광명과 평화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곧 햇살을 받게 될 창호지 방문의 빛깔, 무명 옷의 빛깔이 배어나오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고난과 시련을 겪어내고서 얻은 초연함과 밝음이다.
1914년 강원도 양구 산골에서 태어난 박수근은 가난 때문에 국민학교밖에 다닐 수 없었다. 6.25동란 중 월남한 그는 부두노동자, 미군부대 PX에서 초상화 그려주는 일 따위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 힘들고 고단한 삶속에서도 그는 삶의 힘겨움을 탓하지 않고 어려움 속에 살아가고 있는 서민들의 무던한 마음을 그렸다. 절구질하는 여인, 광주리를 이고 가는 여인, 길가의 행상들, 아기를 업은 소녀, 할아버지와 손자 그리고 김장철 마른 가지의 고목들...
귀가, 헐벗은 나무, 기다림을 통해 희망을 끈을 놓지 않았다. 박수근의 그림은 비어 있는 소외의 공간이 보이지만, 희망과 따스함을 환기시켜 준다. 5일장이 있는 읍내거리, 판자촌 등 초라하지만, 삶의 체온이 느껴지는 풍경과 그 속에 있는 인물들을 포착하여, 그 시대에 겪고 있는 서민의 한과 정감을 그려냈다. 안으로 잘 가라앉혀 은근한 표현법으로 나타내고 있다. 피리소리가 울려나와 한숨을 지우는 마음의 비법일 듯하다. 1963년 백내장으로 왼쪽쪽 눈을 실명하고도 붓을 놓지 않았던 그다.
박수근은 “인간의 착함을 그린다”고 했다. 그는 가장 살기가 어려웠던 때를 묵묵히 참아낸 사람들의 표정을 암각화처럼 각인시켜 놓았다. 서민의 선한 삶의 모습들에서 밝아오는 아침의 표정을 보고 있었다. 맑은 눈물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서민들의 벗이 되어 그들의 삶과 마음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화가가 되진 못했을 것이다. 박수근의 그림에선 착함과 거룩함이 넘치고 있다. 과장이나 집착이 없었기에 순수하고 맑았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때 묻지 않은 순수와 착함으로 살다가 65세에 이승을 하직한 화가 박수근-. 박수근이 남긴 작품들은 그의 삶이요, 서민들의 자화상이다. 맑은 눈으로 수필을 쓰듯 서민들의 눈과 마음을 들여다 본 사람이다. 그림으로 남겨진 눈물겹고 거룩한 수필들을 오래동안 읽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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