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로 가는 긴 여로
김 학
가을이다. 높푸른 하늘엔 청자 빛이 잠겨있고, 따사로운 햇살은 외할머니의 눈빛처럼 그윽하다. 지난여름 그 혹심한 가뭄과 연일 신기록 행진을 거듭하던 무더위도 어느새 아스라한 추억 속으로 숨어버린 지 오래다.
뜨락엔 어느 시인이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라고 읊조렸던 낙엽이 널려 있다. 감잎, 은행잎 등 갖가지 낙엽이 서로 몸을 비비며 뿌리로 가는 긴 여행에 나서고 있다. 바람이 분다. 가을바람이 분다. 낙엽은 저항하지 않고 그 바람이 시키는 대로 뒹군다. 때로는 신음소리를 내기도 하고, 때로는 입을 다문 채 구르기도 한다. 바람이 잠시 멎는다. 낙엽은 그냥 그대로 누워 있다. 조용한 침묵, 고요한 정적이 흐른다.
낙엽은 자기가 걸어온 삶의 역정을 되짚어 반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풍요로운 결실이나 화려한 개화(開花)를 꿈꾸며 피어오르던 봄이며, 따가운 햇살도 두렵지 않던 여름을 떠올리는 지도 모른다. 찬란한 개화나 풍성한 결실이 낙엽에게는 어떤 의미로 남을까.
이른 새벽 어둠을 밟고 건지산에 오르면 만나는 노인들이 있다. 젊음을 바쳐 일하고 현역에서 물러난 노인들. 어떤 노인은 지팡이에 의지하는가 하면, 어떤 노인은 정정한 모습으로 아침을 맞기도 한다. 노래 가락을 흥얼거리며 산에 오르는 노인이 있는가 하면,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느릿느릿 걷는 노인도 있고, 기운차게 걷는 노인도 있다. 아침마다 마주치는 이 노인들에게서 나는 낙엽냄새를 맡는다. 인생의 황금기를 소진해 버린 노인과 한여름의 푸름을 상실해 버린 낙엽의 가는 길은 어디일까. 그 목적지는 뿌리일 것이다.
가을이다. 탐스런 국화송이가 꿀벌을 불러모으고, 늙은 호박이 가을이 왔음을 귀띔해 준다. 비지땀을 닦으며 여름의 고개를 넘어 가을에 닿으면 허허로운 사념에 젖는다. 그러기에 가을을 일러 남성의 계절이라고 하는 것일까.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우수수 낙엽이 진다. 철없는 아이들이 깡충거리며 뛰어 놀 듯 낙엽도 바람과 더불어 술래잡기를 즐기며 깔깔거린다. 수직으로 낙하하는 낙엽도 있고, 흔들리며 사각(斜角)으로 떨어지는 낙엽도 있다. 어떻게 떨어지든 낙엽은 낙엽이다. 정년퇴직을 하든 명예퇴직을 하든 현역을 떠나기는 마찬가지인 인생처럼.
가을이다. 귀뚜라미의 연주에서 즐거움보다는 쓸쓸함을 느끼게 되는 가을이다. 벌거벗은 몸으로 빨간 감을 주렁주렁 매단 뜨락의 감나무에서도 허무가 묻어난다. 가을이 가져다주는 감상주의 때문인가 보다.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싶다. 내장산의 단풍터널을 발목이 시도록 거닐어보고 싶고, 설악산의 내설악과 외설악의 계곡을 오르며 천자만홍(千紫萬紅)의 단풍과 눈맞추고 싶다. 그 여행에 마음 맞는 술벗 한 사람쯤 동반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지난 일요일 원로교육자 K옹과 점심식사를 같이 할 기회가 있었다. 교장과 도교육청 요직을 두루 거치고 일선에서 물러난 K옹은 올해 연세가 75세라고 했다. 그런데도 K옹은 60대 못지 않은 젊음을 누리고 있었다. 아직도 줄담배를 태우는가 하면 식사 때마다 소주 한 병 정도의 반주를 즐긴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K옹은 다른 퇴직교장들과는 달리 일거리를 만들어가며 생산적인 제2의 인생을 펼쳐가고 있었다.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하는가 하면, 독서에 정진하고, 사회봉사에 앞장서고 있다는 말씀이셨다. 현직에 있을 때보다도 더 시간을 잘 활용하는 듯 보였다.
나는 K옹과 더불어 술잔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노인상(老人像)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낙엽도 낙엽 나름이듯 노인도 노인 나름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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