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에 걸린 푸가
가인 김영희
비
저녁이다. 비만 가득한 여름 저녁이다. 며칠째 계속되는, 밤 낮 없이 내리는 비. 원고는 접어두고 창 밖만 내다보고 있다. 음악은 꺼 버렸다. 음악보다 빗소리가 더 음악 같기 때문이다. 밖은 어스름이 짙어진다, 점점. 비가 지붕을 적시고, 창을 적시고, 꽃나무를 적시고 그리고는 담을 넘어 세상을 적신다.
비 내린다. 내 안에도 비가 내린다. 내 걸어온 길, 내 떠나간 사랑에도 비 내린다. 침묵. 그때 우리는 빗소리만 듣고 있었다. 정적. 말은 필요 없었다. 음악 따위도 물론 없었다. 우리에게 더 이상 남은 것은 없었다. 침묵. 다만 침묵. 그리고 마침내, 그가 일어섰다. 그가 열고 나간 문을 닫진 않았다.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창으로 갔다. 창에 빗발이 심해진 탓인가, 눈앞이 흐렸다. 아파트 작은 광장, 그가 박쥐우산을 쓰고 멀어져가고 있었다. 내리는 비도 떠나려는 그를 결코 잡질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긴 했다. 다만 비는, 떠나는 그를 적시고 창 뒤에 남아 석상이 된, 내 눈을 적실뿐이었다.
그 날 이후, 오랫동안 비 오는 날이면 버릇처럼 이렇게 창가에 서게 된다. 한동안은 빗속을 뚫고 그가, 우산을 쓰고 다시 돌아오리라 믿던 저녁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그를 기다리질 않는다. 그가 영원히 돌아오질 않을 것임을 안다. 우리를 이어주던 다리가 이미 무너져 버린 것을 이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대신 내게는 그동안 유보시켜 놓은 내 꿈인, 내 글이 있다. 오직, 내 글만이 내 미래.
비가 내린다. 비만 가득한 여름저녁이다. 비는 지붕을 적시고, 창을 적시고, 꽃나무를 적시고 그리고는 담을 넘어 세상을 적신다. 그리하여 나 또한 비에 젖어 스스로 비가 되어 가는 저녁이다.
배롱나무에 걸린 달
문득 창 밖이 조용해졌다. 비가 그친 모양이다. 눈이 침침하다. 읽던 책을 접고 크게 기지개 몇 번 켜고 문을 열고 마루로 나왔다. 문득 깊은 어둠. 저만큼 마당. 언제나처럼 닫힌 마음눈[心眼]을 열어주는 친근한, 키 큰 세 그루 배롱나무. 마당으로 내려서자 홀연 서늘한 바람. 가슴이 시리다. 비가 떠난 자리를 바람이 채우고 있는 걸까. 하늘을 본다. 어느새 하늘에 달이, 키 큰 배롱나무 가지사이에 손님처럼 떠있다. 달, 배롱나무에 걸린 달.
배롱나무 쪽으로 걸어간다. 녀석들은 며칠째 계속되는 비에, 그 발치에 그렇게도 수북이 꽃잎을 떨구어 놓고도 여전히 매운 가지에 아직 꽃잎을 여유롭게 매달고 있다. 만당홍滿堂紅. 이 늙은 배롱나무들. 내 유년 어느 시절 선친은 이 집을 마련하고 배롱나무를 심고 그 아래 우물을 팠다. 그때 그는 어떤 꿈을 꾸었을까.
우물 속에, 배롱나무에 걸린 달빛 한 송이 떨어져있다. 그 위에, 배롱나무 붉은 꽃잎 하롱하롱 떠 있다. 선친은 저 배롱나무에 걸린 달이 떨어질 곳을 미리 알고 여기에 우물을 마련하고는 월정月井이라 이름 붙였던 것일까. 내 마음 깊은 곳에도 우물 하나있다. 그러나 이제는 빈 우물. 우물 속에 찰랑이는 달, 저 달을 퍼 올리고 싶다. 저 달을 퍼 올릴 두레박하나 갖고 싶다. 그 두레박으로 저 달을 퍼 올려 비어버린 내 우물 채우고 싶다. 내 마음속 빈 우물 채워 젊은 날 내 서늘하던 꿈 되살리고 싶다. 그리하면 그 서늘하던 내 사랑 되살아 올 거니.
물방울과 그림자
며칠 만에 맑은 날이다. 밖으로 나왔다. 대기는 습기로 눅눅하나 더위는 한결 가라앉아 있다. 높고 낮은 고만 고만한 크기의 마을 주택들. 그 주택들 사이로 난 길. 길은 아직 젖어있다. 이번 여름은 이상하다. 햇빛보다 더 잦은 비와 그 비가 쓸고 간 자리에 맺히고 괴인 물방울들과 물웅덩이가 더 흔하다. 그래, 물방울들ㅡ길가에 선, 비에 씻긴 잎 무성한 나무와 주택들 담장에 맺힌 물방울들, 그리고 깨어진 보도에 괴인 물이 가끔 햇빛에 유리알처럼 반짝인다. 물이, 물방울이 빛이다. 그 빛을 눈 시려 하며 길을 걷는다. 20년 만에 온길. 미로 같은 길. 이제는 낯설어진 길. 비어있는 길. 그 길을, 비 개인 길을 혼자 걷는다. 모두들 어디로 간 것일까. 골목을 메우고 놀던 아이들은 다들 또 어디로 간 것일까. 그들은 이 물방울들이 빛인 것을 모르는 것일까.
홀연 바람이 분다. 어디선가 물방울들이 음표처럼 옷깃에 분분히 떨어진다. 다시 물방울 ! 화들짝 놀라 시선을 든다. 이장집 담을 넘어온 늙은 감나무, 그 무성한 잎에서 물방울들이, 바람에 음표처럼 차갑게 흩날린다. 물방울이 음악 같다. 차가운 음악. 한동안 물방울이 멎을 때까지 서 있다가, 불현듯 바닥에 언제나처럼 따라붙은 그림자가 문득 눈에 들어온다. 내 그림자. 녀석은 내게서 나왔으나 나는 아니다. 녀석은 음악을 모른다. 음악 같은 물방울을 모른다. 빛만 아는 녀석. 어둠만 아는 녀석. 고얀 녀석. 다시 걸음을 옮긴다. 모퉁이를 돈다. 그림자는 꺾인다. 비명도 지르질 못하고 꺾인다. 고소하다. 물방울을 모르는 벌이다. 그러나 녀석은 곧 키를 회복한다. 엉큼한 녀석. 걸음을 빨리 한다. 마을을 벗어난다. 저만큼 갈대밭이 보인다. 그 너머는 강이다.
강둑에서
강둑. 앉을만한 곳을 찾는다, 비에 젖은 풀잎을 피해. 저기 드문드문 식재된 나무들. 그 나무들 가운데 하나, 그 아래 반쯤 땅속에 박힌 작은 바위가 있다. 그 위에 손수건을 깔고 앉는다. 나뭇잎에서 물방울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바람 때문이다. 강둑엔 온통 바람이다. 바람에 비린 물 냄새, 여린 풀냄새, 나무즙 냄새가 섞여있다. 저 아래에 강이, 내 그리워하던 강이, 푸른 비단이 펼쳐진 듯, 세월처럼 낮게 흐른다.
그러나 강 주변 풍경은 변했다. 유년시절에 나룻배가 다니던 하류엔 다리가 생겼다. 모래와 뻘뿐이었던 강 옆은 고수부지로 조성되어 강변주민을 위한 공원, 철봉과 평행봉 그리고 배구네트 따위의 체육시설이 갖춰진 공원이 되어있다. 거기 사람들이 몇몇 보인다. 강변 벤치에는 아베크족으로 보이는 남녀도 보인다. 강가 얕은 물에서 재첩을 잡는 아이들과 낚시꾼 따위는 보이질 않는다. 여기에 온 게 이년이 되어 가는데도 저 풍광들이 아직도 낯설다. 세월처럼 풍광도 나이를 먹나보다. 아니, 어쩌면 풍광만은 더 젊어 가는 건가.
끊임없이 바람이 분다. 강 너머는 숲. 그림같이 짙푸른 숲이다. 바람은 거기서 분다. 숲에서 일어나, 바람은 물결을 만들어 강을 건너고 고수부지를 거쳐, 강둑 가득한 풀들을 눕히고 내 머리 위 나무를 흔든다. 그 바람이 나를 씻는다. 그래, 내 속에 언제나 이 강의 바람한줌 있었다. 믿음의 간난艱難에 허덕일 때마다, 삶의 신산에 식은땀을 흘릴 때마다, 이 강의바람을 그리워했다. 나를 씻어주던 이 강의 바람한줌을. 삶이라는 감옥에 갇힌 囚인이, 사랑이라는 족쇄에서 겨우 풀려, 이제야 이 강에 돌아왔다. 아아, 다시는 이 강을 떠나고 싶질 않다.
매미의 꿈
며칠동안 매달렸던 원고를 겨우 끝냈다. 맞춤법 점검을 한번 더하고 메일로 보내면 될 것 이다. 눈이 아프다. 의자를 뒤로 물리고 몸을 젖힌 채 눈을 감는다. 긴장이 풀린 탓일까. 아득하던 매미소리가 바로 옆인 듯, 귀에 시끄럽다. 눈을 뜬다. 창 밖을 본다. 멀리 종남산이 보인다. 유년시절, 여름이면 사내애들 틈에 끼여 저 산에 매미를 잡으러 가곤 했다.
보름 남짓 머무를 수 있을 뿐인 저 미물들은 어쩌자고 저렇게 극성스럽게 울어 되는 걸까. 매미는 한번 나무에 앉으면, 다른 날개 달린 곤충들과는 달리 잘 날아다니지도 않는다. 저렇게 울자고 7년 동안이나 땅속에서 그 신산辛酸을 견디어 낸 것일까. 고대 중국에서는 망자를 보낼 때, 매미처럼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입에 매미 모양으로 깍은 옥을 물려주었다 한다. 만약 그 믿음이 맞다고 가정하고, 또 전생에 누군가가 내 입에 옥으로 만든 매미를 물려주었다고 하고, 인간의 수명을 70년으로 잡아 계산해보면, 나는 대략''', 1200여년 가까이 부활의 몸부림을 쳐왔던 셈이 된다. 문득, 매미소리 아득하다.
다시 눈을 감는다. 1000년 이상 ! 나는 그 긴 세월동안 부활의 몸부림을 치며 무슨 꿈을 꾸어온 것일까. 먹고 배설하고 기뻐하고 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그리고 때로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때로는 미워하는 그런 생을 꿈꾸었던 것일까. 가령, 그렇다하더라도 나 이제 기울어 가는 나이ㅡ게다가, 그 모든 것을 잃었다. 다만,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다시 매미소리 시끄럽다. 눈을 뜬다. 지금 내 앞에는 워드의 깜박이는 커서만 있다. 내 글, 유일하게 남은 내 꿈. 생에 실패한자는 누구나 부활의 꿈을 꾼다. 그러나 문제는, 그래, 문제는 부활이 아니라 노래이다, 저 매미처럼.
마트에서
된장과 김치가 벌써 떨어졌다고? 고얀 녀석, 전화도 오래간만에 하면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그래, 밑반찬은 이미 동이 났을 게다. 찬을 마련하기는 귀찮았을 거고 또 제대로 할 줄도 모르고, 그래서 김치와 된장만 먹었음에 틀림없다. 배추와 젓갈을 카트에 담았다. 고추와 마늘은 집에 있다. 이번엔 밑반찬을 좀 넉넉히 마련해 줘야겠다. 어물이 있는 곳으로 간다. 저녁 무렵 이어서인가, 마트 안은 사람들로 붐빈다. 젊은 여자들, 중년부부들, 할머니들 그리고 카트에 아이를 태운 젊은 남성들도 있다.
이런 작은 농촌마을에도 대형 마트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마트가 재래시장보다 편리 하긴 하다. 상품들이 단일매장에 모여 있고, 가격도 싸고 신선하며, 품질 또한 우수하다. 그러나 마트에 올 때마다 기분이 다소 묘하다. 뭐랄까. 마치 대량생산되는 컨베이어벨트 앞에 서 있는 직공의 기분이랄까. 앞이 비었다. 새우, 버섯, 멸치, 오징어, 게, 명태포, 쥐치포를 차례로 카트에 담았다. 카트에 담긴 상품들과 메모해온 품목을 대조한 후 계산대로 간다.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앞에 아기를 안은 젊은 남자. 아기가 아빠어깨너머 나를 말간 눈으로 쳐다본다. 저 눈, 미니도 저런 때가 있었다. 그런데 방학인데도 안 내려오고, 도서관에서 공부만 하겠다고?
계산을 끝내자 캐셔 처녀가 말한다. 주소를 일러주시면 바로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처럼 가볍게 거절하고 손수 카트를 밀고 밖으로 나온다. 왜냐하면, 아직은 내 손으로 장을 볼 수 있는 나이의 여인임을 확인하고 싶고, 또 아직은 내 손길이 필요한 한 아이의 어머니임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에.
바하
오전 내내 전날 장봐온 야채와 건어물로 밑반찬을 만들었다. 오후에는 소금에 절여 놓은 배추로 양념을 하여 김치를 담궜다. 아직도 코가 맵고 손이 화끈거린다. 주방에서 거실로 들어온다. 잠시휴식을 취하고 싶다. 음악을 들으며. 그럴 자격이 있다. 나는 일했으므로. 음반을 턴테이블에 얹고 소파에 몸을 묻는다. 눈을 감는다. 귀만 열어놓는다. 음악이 흐른다.
바하다. 무반주첼로 모음곡. 파블로 카잘스 연주음반이다. 첼로 선율. 단선율들. 그 단선율들이 여러 겹으로 중첩되고 있다. 그래, 중첩되어 펼쳐지고 있다. 카잘스는 이 곡을 십이 년 동안이나 연구하여 세상에 선보였다. 이상하다. 나이를 먹을수록 바하가 좋아진다. 젊을 땐 그를 들으면 그저 덤덤했다. 그러나 이젠 그를 들으면 편안하다. 이제 내 곁에 음악만 있다. 바하만 있다. 일은 잠시 젖혀둔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그의 숨결을, 저 선율들에서, 바하의 숨결을 느낀다.
바하, 그는 근면 성실했다. 아주 조용한 생을 살았다. 그러나 음악에 있어서는 완벽주의 자였다. 그의 음악은 수학적으로 치밀하게 계산된 단단한 대리석 건물이다. 그러나 인간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건물이다. 그는 아이를 스물 하나나 낳았다. 아이들에게 그는 꿈을 나누어주는 아버지였다. 음악이라는 꿈을. 나는 내 아이에게 무엇을 나누어 줄 수 있을까. 아니, 나누어 줄 수 있는 게 있기나 한 걸까 ?
거울
미니에게 줄 반찬들을 차에 실었다. 그리고 거울 앞에 앉았다. 거울은 여자가 세상에 나가기 전에 통과해야하는 첫 번째 문이다, 나이에 관계없이. 거울 속에 한 여인이 있다. 갸름한 얼굴, 긴 목, 작은 어깨, 그리고 마르고 긴 몸피. 눈에 익숙한 자신의 모습. 내 모습이, 조금씩 조금씩, 낯설어 간다. 피부는 윤기를 잃고 눈 밑엔 주름이 내려앉고 머리칼은 바래어가고 있다. 그러나 저 모습이 내 모습이다. 나이 먹어 가는 내 모습.
촘촘히 머리를 빗는다. 그리고 정성스레 말아 올려 나비리본으로 묶는다. 처음 얼마간은, 거울에 비치는 나이 먹어 가는 내 모습이 두려웠다.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 때, 내 속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렸다ㅡ어떤 갈증 같은 것, 어떤 조급증 같은 것이. 혼돈 같은 혹은 어둠 같은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내게 등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분노. 그러나 나는 기다렸다, 그가 돌아오기를, 오랫동안.
스킨로션과 루즈만 아주 엷게 바른다, 얼굴에는. 나이 먹어 가는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그에게 결단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거부했다. 그때야 비로소 나는 알았다. 내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의 정체가 내 글, 내 유보된 꿈이었음을. 일면 그가 고마웠다. 거울 앞을 정리하고 일어선다. 나는 이제 더 이상은 나이 먹는 것이 두렵진 않다. 왜냐하면, 내 속에 미루어놓은 꿈이 다시 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내 몸은 내 꿈들의 숙주宿主다. 나이 먹어도 여인은, 꿈이 있는 한 새롭게 태어난다. 매일매일.
|
|
Home 자작 수필을 올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