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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날개(2017-12-16 20:12:48, Hit : 493, Vote : 102
 벤치가 있는 풍경 - 윤온강

벤치가 있는 풍경

                    윤온강

  아내는 벤치를 좋아한다. 어디 가다가도 조경이 잘 돼 있는 곳에 반듯한 벤치가 있으면, 거기 꼭 한번 앉아 보고 싶어 한다. 아늑한 호반에 벤치가 있다면 두 말할 것도 없다. 호수의 물을 바라보며 저물도록 앉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아내의 동심이 재미있어서 가끔 장단을 맞춰 주기도 한다. 어쩌다가 그럴 듯하게 생긴 벤치가 눈에 띄면 어쩌나 보려고 한 마디 해 본다.
  “저기 벤치가 있는데 앉아 보지 그래?”
  그러면 아내는 서슴없이,
  “그럴까요?”
하면서 정말 거기 가서 앉는다. 그리고 짐짓 아주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이런 아내에 나도 모르게 동화되었는지, 언제부터인가 벤치가 친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벤치를 보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거기 가서 아내처럼 꼭 앉아 보지는 않더라도 벤치는 언제든 부르면 달려올 친구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도대체 이런 느낌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어느 하루 아주 작심하고 앉아서 벤치를 관찰해 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그에게 그렇게 다양한 얼굴이 감추어져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벤치는 남모르게 숨어서 도와주는 겸손한 봉사자다. 그들은 도시의 귀퉁이, 그리고 공원의 여러 곳에 몸을 감추고 있어서 얼른 눈에 띄지 않지만 다리 쉼이 필요한 노인, 다정한 연인, 고독한 산보자들에게 언제든 안식을 제공해 주는 고마운 존재다. 그러나 마음이 급한 사람이나 바쁜 사람에겐 일별도 주지 않는다.
  벤치는 사색의 안내자다. 그에게 등을 기대고 있으면 높은 사유의 세계로 안내해 주고, 깊은 명상에 잠기게 해 준다. 때로는 도시의 훤소(喧騷) 속에 앉아 있어도, 깊은 산 속 같은 적요(寂寥)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벤치는 언제든지 기꺼이 고독의 동반자가 돼 준다. 참다운 고독 가운데서 자기를 만나게 해 주는 묵언(黙言)의 동행자다.
  그는 또한 창조의 여신이다. 거기 앉는 사람들에게 상상의 나래를 달아주어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아이디어를 떠오르게 한다. 모차르트로 하여금 악상이 떠올라 집으로 뛰어가게 하던 벤치. 아니, 집에 가다가 악상이 사라질까봐 도로 주저앉아서 그 벤치에다 악보를 그렸다는, 거짓말 같은 옛 이야기를 나는 믿고 싶다.  
  대학로 어느 벤치에는 가끔 어떤 여인이 대낮부터 퍼질러 앉아 술을 마시는 모습이 보인다. 그 옆에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아 한 곳만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청년이 있고, 또 한쪽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는 노숙자도 보인다. 벤치는 이런 빗나간 인생들의 말없는 후원자요 보호자가 되어주기도 한다.
  갈 곳 없는 사람, 마음의 여유를 잃은 사람, 실의에 잠긴 사람, 심지어 마음에 미움을 담고 있는 사람까지도 다 감싸주는 따뜻한 인도주의자며, 볼 걸 다 보고도 모른 체하고 그 모든 것을 수용하는 벤치는 사람으로 치면 한 없이 넓은 아량을 지닌 박애주의자다.    
  벤치는 본시 누군가와 같이 앉으라고 만들어 놓은 물건이다. 그래서인지 신기하게도 모르는 사람끼리라도 벤치에 같이 앉아 있으면, 뭔가 거기 따뜻한 감정이 흐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같은 의자에 같은 등받이를 등에 대고 앉아 있으면 우리 자신은 의식하지 못해도 마음과 마음끼리 전류가 흐르듯 끌리고 통하는 무엇이 작용하는 것일까?
  벤치를 처음 만들어낸 사람은 아마도 마음이 아주 따뜻하고 넓고, 세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성자와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지난 번 영국 딸네 집에 다니러 갔더니, 뒷마당에 잔디밭이 있었다. 열 평도 안 되는 작은 공간이었지만, 기계로 가지런히 깎인 그 풀밭에는 가끔 새들이 쉬었다 가곤 했다. 풀들이 조용히 엎드리고 있는 그 풀밭의 풍경은 어딘가 어색한 데가 있었다. 꼭 무엇이 빠진 것 같았다. 당장 아내가 거기 벤치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떠나오기 전날 아담한 벤치를 하나 사다 놓았다. 풍경이 달라 보였다. 벤치가 있는 풍경이 되었다. 아내가 거기 앉아서 예의 그 행복한 표정을 지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윤온강(尹溫江) 약력 :
수필가. 본명 윤영소(尹英昭).
강원 춘천 출신.
춘천고등학교, 서울대 문리대 언어학과 졸업.
서울시 장학사, 교육부 연구관 역임.
2003년 《에세이문학》등단.  2008년~2012년 계간《에세이문학》 주간 역임.
현재 사단법인 한국수필문학진흥회 회장 겸 계간《에세이문학》발행인
제34회 현대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따뜻한 강》《맨해튼에서 길을 잃다》(2016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 도서)
일화집《짧은 이야기 긴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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