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함께 음악을 / 도월화
루실 정은 캐나다에서 사는 한국인 피아니스트이다. 겉보기에는 갓 20대에 들어선 그 또래와 다를 게 없다. 생머리 단발에 호리호리한 몸매, 앳되고 작은 얼굴의 연약한 소녀이다. 그러나 피아노 연주를 할 때는 작은 마녀처럼 관중을 힘 있게 끌어당긴다. 나와 대학생인 큰아들은 음악의 문외한이지만 한 번 그녀의 연주를 본 후 금방 팬(fan)이 되어버렸다. 아니, 찬양자(admirer)가 되었다고 할까. 사전에 엘비스 프레슬리 팬(a Presley fan)이라 하는데 비해, 클래식 음악 등의 팬은 예를 들어 a Mozart admirer (모차르트 팬) 라 한다고 나와 있으니까.
"어머니, 앞으로 루실 정이 아니면 저보고 클래식 음악회는 가자고 하지 마세요." 하고 아들이 말했다. 그 때 프레쉬맨 이던 아들은 헤비메탈에 빠져서 전자 기타를 배우고 있었다. 안 그래도 클래식 음악회는 가고 싶지 않다는 걸 억지로 몇 번 같이 가본 적이 있는데 이제 묘한 핑계거리가 생긴 것이다.
1950년대 중반부터 엘비스 프레슬리는 록 바람을 몰고 왔다. 엘비스 프레슬리 이후에는 컨트리 음악으로 성공을 꿈꾸는 젊은이가 사라졌다고 하는 말이 있다. 1960년대 말 록 음악은 프라그드 음악의 융성과 더불어 가지를 쳐서, 하드 락은 요즘의 헤비메탈로 이어진다. 내 눈에 비치는 헤비메탈 그룹은 퀭한 눈동자에 괴상망측한 머리 모양을 하고 때로는 웃옷을 벗어 재낀 채 꽥꽥 소리만 질러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소리를 너무 들으면 인간성에도 나쁜 영향을 줄 것 같다. 내가 싫어 하니까 아들은 이어폰으로 혼자서 듣는다. 그게 또 나는 참을 수가 없다. 귀에 밀착하여 듣는 것이 더 안타까운 것이다. 바이올린 연주회 티켓이 있어서 아들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음악회에서 만이라도 클래식을 들을 기회를 주고 싶었다. 음식도 편식이 나쁘고 음악도 골고루 들으면 얼마나 좋은가하면서.
"루실 정이 아니면 안 간다고 했잖아요? 아버지하고 두 분이서 오붓하게 다녀오세요. 네? "하고 아들이 말했다. `에구, 쟤를 어떻게 데려가지? ' 하며 며칠을 궁리했다. 연주회 날이 임박하여 아들에게 "너희 아빠는 바쁘대. 갈 때는 나 혼자 가도 되는데 올 때는 너무 늦어서 엄두가 안 나네. 너는 음악 들으러 가는 게 아니고 엄마의 보디가드로 가자꾸나." 했다. 천성이 착한 편인 아이는 겨우 반승낙했다. 드디어 연주회 날 저녁 거의 반 강제로 같이 세종문화회관으로 갔다.
세종문화회관 소강당 무대는 단순하고 소박하다. 나뭇결무늬의 바닥에 놓인 것이라고는 검은색 그랜드피아노와 보면대 뿐이다. 장식이라고는 미색 천정에 일 열로 설치해둔 전광판만 보인다. 무대 뒤의 연회색 벽에도 아무 것도 붙여 놓지 않아서 깨끗하다. 누구누구 독주회라고 써 붙여 놓으면 초등학교 학예회 같을까. 화분이나 꽃꽂이 장식 한 가지도 없는 절제된 무대이다. 시작 벨이 울리고 실내가 어두워진다. 조명등이 켜지면서 오늘의 연주자가 검은색 연주 복을 입고 나온다. 대개 곡을 연주하기 시작 할 때는 연주자의 표정도 긴장감을 띈다. 관객도 그 날 낮의 잡다한 일이 그대로 머리 속에 맴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중간 휴식시간이 지나 하이라이트라고 할까, 요리로 치자면 주요리(메인 디쉬)에 비해도 좋을 곡이 연주된다. 이때쯤이면 연주자의 얼굴도 다소 편안한 웃음을 띤다. 객석에서도 연주자와 얼굴을 익히고 음악에 빠져들어 밖에 두고 온 일상의 걱정을 잠시 잊는다. 다른 날 같으면 나도 느긋이 음악에 몰두하게 됐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날은 도무지 음악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아들이 옆에서 귀에 이어폰을 꽂고 헤비메탈을 듣고 앉았기 때문이다. 자기는 음악 들으러 온 것이 아니라 보디가드로 왔으니까 직분에 충실하고 있다는 표정으로.
순간 동상이몽(同床異夢) 이란 말도 생각나고 오월동주(吳越同舟) 라는 말도 떠올랐다. 생각 같아서는 이어폰을 확, 낚아채고 머리라도 한 대 쥐어박고 싶은데 교양 있고 조용한 분위기에 교양 있는 척 참고 있자니 어디 음악 감상인들 제대로 되겠는가.
아이들은 몇 번 바뀐다고 하더니 한 해 남짓 그러던 아들은 곧 헤비메탈에도 시들해졌다. 이젠 예술의 전당 음악회 티켓이 생기면 자청해서 달라고 한다. 여학생 남학생 친구들과 오페라 하우스 옆 구내식당에서 저렴한 가격의 저녁식사를 화기애애하게 한 후에, 옆의 콘서트 홀 이나 리사이틀 홀로 가서 연주를 듣는다. 이젠 이어폰과 헤비메탈CD는 가져가지 않는다.
모차르트 시대의 젊은이들은 저녁에 살롱에 모여, 오페라 [마술피리]중의 새 장수 파파게노가 부르는 노래를 많이 불렀다고 한다. 서태지 노래처럼 유행한 셈이다. 파파게노와 그의 애인 파파게나의 이중창은 아주 빠르고 랩 비슷하지 않은가. 모차르트 시대이든 오늘 날 이든,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음악에 다 함께 열광하며 젊음을 발산 할 수 있는 것은 축복이다. 다만 클래식에서 헤비메탈까지 골고루 들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달라진 아들을 보면 너무 걱정 할 일은 아니다.
"루실 정은 너 나이 또래인데도 그 어려운 것을 연주까지 하는데 듣는 것도 못하니?" 하고 그날 집으로 돌아오며 무식하게 몰아세운 것이 지금은 후회된다. 남과 비교하는 것이 자녀교육의 금기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실천은 어렵다. 그냥 둬도 때가 되면 자연스레 변화하기 마련인데 너무 나의 잣대로만 재려 들었다. 작은 애에게는 이런 시행착오는 훨씬 덜 했다고 생각된다. 오는 5월 입대하라는 징집영장을 받아 둔 큰애한테는 어설픈 엄마 만나서 이래저래 고생 많았다고 이참에 말해 두고 싶다.
- 도월화 수필집 ' 여월여화 (如月如花)'/2007년 봄 선우미디어 출간,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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