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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지는 여자 -뒤집어 보기
한상렬
1. 노인과 여인
명화를 감상한다. 눈이 부시다. 황홀한 여체가 눈에 가득 들어온다. 남이 볼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린다. 하나 이는 분명 예술작품의 감상이다. 예술작품을 보는 나의 심미안審美眼이 과연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푸에르토리코의 국립미술관에는 푸른 수의를 입은 노인이 젊은 여자의 젖을 빠는 <노인과 여인> 이라는 그림 한 점이 걸려 있다. 방문객들은 노인과 젊은 여자의 부자유스러운 애정 행각을 그린 이 작품에 불쾌한 감정을 표출한다. “이런 싸구려 그림이 어떻게 국립미술관의 벽면을 장식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미술관의 입구에….” 딸 같은 여자와 놀아나는 노인의 부도덕을 통렬히 꾸짖는다. 의아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푸른 수의囚衣를 입은 주책없는 노인과 이성을 잃은 젊은 여성은 가장 부도덕한 인간의 한 유형으로 비쳐진다. 도대체 작가는 어떤 의도로 이런 불륜의 현장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일까? 과연 이 그림은 삼류 포르노에 불과한가.
수의를 입은 노인은 젊은 여인의 아버지요, 커다란 젖가슴을 고스란히 드러내 놓고 있는 여인은 분명 노인의 딸이다. 노인은 푸에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투사였다. 독재정권은 노인을 체포해 감옥에 넣고 가장 잔인한 형벌을 내렸다. 이른바 ‘음식물 투입 금지’였다. 노인은 감옥에서 서서히 굶어 죽어갔다. 노인이 죽기 직전이었다. 딸은 해산한 지 며칠 되지 않은 무거운 몸으로 감옥을 찾았다. 아버지의 임종을 보기 위해서였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눈에 핏발이 섰다.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아버지 앞에서 무엇이 부끄러우랴. 여인은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가슴을 풀었다. 그리고 불은 젖을 아버지의 입에 물렸다. <노인과 여인>은 부녀간의 사랑과 헌신과 애국심이 담긴 숭고한 작품이다. 그래서 푸에르토리코인들은 이 그림을 민족혼이 담긴 ‘최고의 예술품’으로 자랑하고 있다.
동일한 그림을 놓고 사람들은 ‘포르노’라고 비하하기도 하고, ‘성화’라고 격찬하기도 한다. <노인과 여인>에 담긴 이런 비극적인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림을 감상하며 비난을 서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 속에 담긴 본질을 알고 나면, 이내 눈물을 글썽이며 명화를 감상한다.
우리는 이따금 본질을 파악하지도 않고 그저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는 잘못을 범한다. 그래서 사물의 본질을 알면 분명 그 시각이 달라진다. 그렇다. 교만과 아집, 그리고 편견을 버려야만 세상이 제대로 보이게 마련이다. 그래 보여지는 대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인다.
2. 올랭피아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미술관에는 1863년 같은 해에 발표한 누드화가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하나는 핑크빛 살결에 나긋나긋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알렉상드르 카바넬Alexander Cabanel의 <비너스의 탄생>이요, 다른 하나는 땅딸막한 몸매에 성질이 꽤나 사나워 보이는 에두아르 마네Edouart Manet의 <올랭피아Olympia>다.
한 여인은 그 해의 누드로 꼽혀 황제 나폴레옹 3세에 의해 궁정생활의 온갖 영예를 누린 반면, 또 한 여인은 온갖 욕설과 비난 속에 평생 화가의 집에 처박혀 있어야 했다.
<비너스의 탄생>은 아름다운 나신의 극치다. 여인의 누운 몸은 완만하다. 휘어진 허리의 선, 배는 납작하고 엉덩이는 우리를 향해 잘 보이도록 배치되어 있다. 바싹 오그린 넓적다리가 아주 탄력 있어 보인다. 나른하게 들어올린 팔은 풍만한 가슴을 더욱 돋보이게 하여 에로틱하기 그지없다. 얼굴의 표정은 불분명하지만 길게 늘어뜨린 금발의 풍성한 머릿결이 결코 심상치 않다. 눈 위로 살짝 들어올린 오른 팔과 양탄자 사이로 늘어뜨린 왼팔은 여인의 나신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나신은 포동포동한 큐피드들이 연주하는 멜로디에 도취되었는가. 손이 닿으면 말랑말랑할 듯한 살결의 다섯 큐피드가 날고 있다. 비너스를 찬양하는가. 보는 이의 눈을 황홀하게 한다. 그림을 보는 이들이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여인은 지금 완전 무방비 상태로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다. 만일 비너스라는 허명虛名만 벗는다면 아마도 그녀는 나른한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일 듯싶다.
“나는 당신의 여자예요.”
그 옆에 올랭피아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침대 위에 벌거벗은 여인이 우리를 바라본다. 그녀의 머리에는 붉은 색의 꽃장식이 꽂혀 있고, 두툼한 목엔 가느다란 검정색 리본에 타원형 장식이 매달려 있다. 오른 팔목에 찬 금팔찌에는 동그란 장식이 달려 있다.
여자는 손끝으로 큰 꽃무늬를 수놓은 숄을 잡고 있다. 발에는 닳아빠진 노란색 슬리퍼 한 짝이 걸려 있다. 다른 한 짝은 침대 위에 떨어져 있다. 얼굴이 지나치게 크다싶고 다리는 전체 구도로 보아 좀 짧다 싶다. 배의 굴곡은 불룩한데다 엉덩이는 아예 보여주지 않는다. 창백한 젖꼭지에 가냘픈 어깨선이 파리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녀의 꼭 다문 창백한 입술과 각지고 뾰족한 턱이 그녀로 하여금 차가운 이미지를 엿보게 한다.
그녀가 지금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아주 뻔뻔한 표정이다. 리얼리즘을 표방한 마네의 모델이다. 마치 그녀는 자신의 나신을 보이며 “그래, 볼테면 봐라.”라고 말하는 듯 하다. 몰래 그녀의 나신을 훔쳐보던 이들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명화名畵 속 여인은 보여지는 것인가? 아니면, 보여주는 것인가?
3. 비너스의 탄생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은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이 살롱에서 낙선된 그 해 당당하게 살롱에 전시된 작품이다. 레옹 3세의 눈에 들어 그가 직접 구입한 이 그림은 누드화가 활발하게 등장하고 거부감 없이 전시되던 프랑스의 당시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올랭피아에 비하면 훨씬 퇴폐적이라고 해야 할 이 누드가 무엇 때문에 예상을 뒤엎었을까? 그림 속 여인은 보여주고 있는가? 아니면 보여지는가?
마네는 이미 <풀밭 위의 점심>을 통해 충분히 소동을 일으켰으면서도 다시금 누드화에 손을 대었다. <올랭피아>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사람들의 분노는 대단했다고 한다. 두 명의 경찰이 그림을 지켜야 했고, 전시회가 끝나자 원래 자리에서 떼어 맨 끝 방의 문 위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무뚝뚝하고 거세 보이는 그녀를 두고 왜 그토록 격분했을까? 지나가는 사람마다 돌을 집어서 올랭피아의 얼굴에 던졌고, 마네는 이후 에스파냐로 줄행랑을 쳤을 정도였다고 한다.
<올랭피아>의 충격은 파리를 뒤흔들었다. 모델은 매춘부였다. 그림 속의 여인은 걸어오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위선에 가득 찬 당대 남성들을 향한 도전이다. 그러니 부르주아적 남성들로서는 심기가 자못 불편할 밖에 없었다. 여자가 너무 뻔뻔해서 저질이라는 비난이었다.
정숙한 비너스는 아랫도리를 손으로 가린다. 하지만 올랭피아는 도발적 방법으로 드러내고 있다. 커튼 뒤에는 또 하나의 공간이 있다. 흑인 시녀가 꽃다발을 내밀고 있다. 아마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이가 보낸 것이리라. 남성들의 시선을 다소곳 받아내는 카바넬의 여인과 달리, 마네의 여인은 이렇게 관객을 도발적으로 쏘아봄으로써 관계적 상황을 뒤집고 있다.
명화를 본다. 그림 속 여인의 나신에 눈이 부시다.
명화 속의 나신은 퇴폐적인가? 포르노와 성화聖畵의 차이는 얼마 만큼인가.
보여지는 여자와 보여주는 여자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올랭피아가 나를 쏘아보고 있는 듯하다. 그가 내게 답변을 유도하고 있는 성싶다.
(『선수필』, 2005-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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