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의 기도
(수필시대 2009년 1,2월호 우리문화 산책 단청)
安 貴 順
어린 날부터 자장가처럼 들었던 노래가 있다.
‘정구업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 어머니는 이 염불로 일생을 보냈다. 가족들이 병이 나면 환부에 손을 짚고 주문을 외우듯 했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청승스레 부르던 노래. 그것이 어머니의 삶을 지탱하는 구원의 기도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금강산에서 수행했다는 외삼촌은 도명(道明)이란 불명으로 승복을 입었고, 외할머니는 사찰을 지어 부처를 모시다가 절에서 타계 했다. 어린 날부터 어머니 치마폭에 쌓여 절을 드나들었고, 관광이란 명분으로 전국의 큰 사찰은 거의 다 돌아본 셈이지만 종교에 대한 이해나 사찰을 에워싸고 있는 불교문화조차 관심이 없었다. 예민했던 소녀시절 기독교에 입문하여 꽃다운 청춘을 보냈으니. 어머니에겐 크나큰 배신이었고 불효였다.
외람되지만 내게 불교는 늘 먹는 김치와 된장국이었다면 기독교는 부드러운 빵과 커피처럼 달콤하고 향기롭게 다가왔다. 지금도 불교가 친가라면 기독교는 살가운 외가처럼 둘 다 떨쳐낼 수 없는 인연과 뿌리의식을 실감한다.
어느 날 새벽 넷 망을 서핑하다 청아하게 흐르는 스님의 독경소리를 들었다.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숨가쁘게 흐르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우고 눈을 감았다. 무엇에 감전된 듯 목울대가 먹먹하더니 봇물 같은 눈물이 흘렀다. 모천의 강변에서 귀가 아프도록 들었던 저 소리... 천수경이라 했다.
무엇에 홀린 듯 이른 아침부터 사찰을 찾았다. 인쇄물에 있는 사진만 봐도 합장 배례 절을 하던 엄마의 부처님을 만났다. 어린 날 외가의 법당에서 보았던 그 모습이다. 그때 나는 심심하면 은밀히 법당에 들어가 부처의 용안을 만져보곤 했다. 잘 생긴 코와 유난히 큰 귀, 서늘한 등 쪽을 만지다가 꺼먼 먼지가 묻어나면 수건으로 살며시 닦아드리곤 했다. 그때 돌아서던 내 등 뒤에서 잔잔하게 웃어주던 선한 눈매가 너무 좋았다.
그때는 친구처럼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오늘은 너무 낯설다. 그분은 여전히 웃고 계시는데 공연히 주눅이 든다. 많은 불자들이 연신 절을 올리며 경배를 하건만 나는 법당에도 못 오르고 문전에서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종각이 있는 후진 곳으로 갔다. 해운대 바닷바람이 진땀을 흘리는 나를 위로하듯 이마를 쓸고 간다. 눈앞에 빈 의자가 고맙다. ‘앉아 쉬어가도 좋습니다.’ 라는 듯. 부처의 자비가 참으로 자상하구나 싶다.
차분히 종루를 살펴보니 원색의 단청문양들이 화려하다. 봉황, 기린, 거북, 모란, 매화, 소나무가 조화롭게 얽혀있다. 대표적인 문양은 절을 상징하는 卍 자와 즐거움을 상징하는 喜 자를 연결해 놓았다. 살면서 이래저래 얽혀버린 인연의 고리들처럼. 오색찬란한 문양 속에 팔만대장경의 진리가 숨어 있을 것만 같다.
사찰의 문양은 생활미술이나 단순 감상의 대상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사람의 욕망과 기원을 담은 주술적인 것과 상징적인 조형물이다. 고대로 올라 갈수록 나타나는 암각화 등에서 추상적인 문양이나 청동기에 담긴 기하학적 문양들은 우주와 자연에 대한 외경심과 깊은 관련이 있다. 르네상스시대에도 자연의 중심에 사람이 있다는 인문주의가 유래했듯이 단청문양에 등장하는 자연의 모방은 꽃처럼 새처럼 아름답게 살자는 인류의 눈물겨운 염원이 아닌가.
대웅전을 돌아보니 소와 동자승이 등장하는 연작 단청벽화가 건물 허리를 휘감고 있다. 십우도이다. 동자승과 소, 구름과 물, 소나무가 주연이다. 겉으로 평화로워 보이지만 선사상을 찾아나서는 외로운 수행의 과정이다. 산속에 홀로 던져진 동자는 소의 발자국을 찾으면서 인간의 본성을 찾는다. 소의 고삐를 찾아 쥔다. 인간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견성의 단계, 검은 소가 하얀 소로 변해간다. 소를 길들이는 과정, 삼독의 때를 지우다. 소를 타고 피리를 분다. 소와동자가 일체가 되어 피안의 세계로. 내가 내 마음을 타고 본래의 세계로. 더 이상 아무 장애가 없는 무애의 단계로. 끝내 소는 구름 속으로 꼬리를 감추고 동자만 남았다. 둥근 원, 공의 사상이다. 자아를 찾아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다.
하필 왜 소인가. 해운정사 佛二門을 나서며 그것이 궁금했다. 한문으로 보면 소 牛 밑에 한 一을 그으면 날 生이 된다. 덩치 큰 짐승이 네발로 외나무다리를 건너야하는 형상이다. 너무 순해서 슬퍼 보이는 짐승, 이마에 뿔을 달고 힘도 있어 보이지만 약육강식의 권리는 애초에 포기한 듯, 얼굴에 알짱대는 모기 한 마리도 때려주지 못하고 눈물만 흘린다.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인간을 위해서 인 듯, 살아선 사람에게 순종하고 죽어선 뼈까지 보시하는 짐승이다. 승복을 입은 스님이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來世에 소가 된다 했던가. 근대불교의 선종을 중흥시킨 경허 선사는 자신의 호를 성우(깨우친 소)라 했다.
수도정진 하는 스님들이 소가 된다면 멀쩡한 소를 미치게 한 이 시대 중생들은 죽어 무엇이 될까. 엄마는 저승에서도 염불을 외우고 계시는가. 아직도 내 귀에는 그 기도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
Home 자작 수필을 올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