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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생각하노니
김 학
가을이란다. 지붕 위에 박이 둥두렷이 영글었으니 가을이란다. 길섶에서 온종일 손을 흔드는 코스모스를 보아도 가을이고 마당가의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이 빨갛게 여물어가는 것을 보아도 가을이다. 가을은 벌써 대문을 지나 문지방을 넘어서려 한다.
가을이면 괜히 눈물주머니가 헐거워진다. 높푸른 하늘에 유유히 떠도는 흰구름을 보아도 눈물이 나려 하고, 신혼부부의 금침(禽枕)같은 황금들녘을 거닐어도 눈물이 쏟아지려 한다. 대상을 알 수 없는 감사의 눈물일 듯하다.
이른 아침이면 야트막한 뒷산에 올라 산책을 즐기곤 한다. 갖가지 모양의 나무들과 눈인사를 주고받는다. 소나무, 잣나무, 상수리나무, 아카시아나무…. 종류도 다양하고 수형(樹型)도 가지각색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식물들이 이웃으로 어울려 골짜기를 이루고, 그러한 골짜기들이 얽히고 설켜 산을 형성한다.
감나무와 밤나무 등 유실수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불현듯 유실수 생각이 발걸음을 붙잡는다. 저마다 다른 모양새의 유실수들이 저마다 다른 형태의 열매를 매달고 가을을 맞고 있다. 사과나 감, 그리고 배처럼 나무에서 따서 금방 아작아작 씹어 먹을 수 있는 과일들이 있는가 하면 밤이나 호도처럼 껍질을 몇번씩 벗겨야 겨우 입에 넣을 수 있는 과일도 있다. 그 과일들은 모양만 다른 게 아니다. 맛도 다르고 영양가도 천차만별이다. 과일 한 가지만 비교하더라도 조물주의 오묘한 섭리에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가을에 과일을 따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다. 어떤 과일들은 상전 모시듯 정중하고도 조심스럽게 따야 하는가 하면, 또 어떤 과일은 불쌍한 하인 다루듯 두들겨 패며 따기도 한다. 봄부터 가을까지 긴긴 나날, 꽃을 피우고 벌나비를 접대하며 햇볕·온도·습도·영양섭취 등 임산부 건강관리 하듯 애써서 이 결실의 가을을 맞았는데 왜 그런 차이가 날까.
감이나 사과, 그리고 배는 딸 때 조심해서 따야 한다. 장대로 따더라도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잘못 다루어 땅에 떨어뜨리면 그 과일은 제값을 못 받는다. 그러나 은행이나 호도 또는 밤은 장대로 여지없이 후려갈겨야 딸 수가 있다. 어쩌면 저마다 타고난 과일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사람도 그러는 게 아닐까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칭찬 받으며 성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꾸중을 들으며 성공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상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벌 받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 아니던가.
가을이란다. 귀뚜라미가 연주회의 막을 올렸으니 가을이란다. 이 가을에 책을 읽지 않아도 좋다. 이 가을에 음악을 듣지 않아도 좋다. 이 가을에 연극이나 영화를 감상하지 않아도 좋다. 그대신 심심하면 가을하늘을 우러러보자.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라도 유정하게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보자. 찬란한 이 가을에.
(1992)
* 김학 수필가 약력
1980년 월간문학 등단/ 《실수를 딛고 살아온 세월》《자가용은 본처 택시는 애첩》등 수필집 10권, 수필평론집 《수필의 맛 수필의 멋》출간/ 펜문학상, 한국수필상, 영호남수필문학상 대상, 신곡문학상 대상, 연암문학상 대상, 대한민국 향토문학상, 전주시예술상 등 다수 수상/ 전북수필문학회 회장, 대표수필문학회 회장, 임실문인협회 회장, 전북문인협회 회장, 전북펜클럽 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이사장 역임/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전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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