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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牛)
윤희경
‘마나마나 이러이 말이 맘마마,
어디어디 어디어 어치,
넘나들지 말고, 아냐아냐.’
목청소리도 구성지게 일소들을 달랜다. 겨우내 놀 먹고 지낸 결이소들, 갑작스런 노역에 힘이 겨운 지 쟁기 밥이 솟아나올 때마다 눈을 꿈적 게거품을 품으며 콧물을 흘리고 있다. 잔꾀를 부리던 마라(바깥소)에게 ‘이놈의 소’, 회초리로 엉덩짝을 철썩 내리친다. 그때마다 물렁한 옆구리 배통이 불룩하게 씰룩거리고 쟁기에 속도가 붙는다. 보습이 돌밭에 부딪히며 부서질 듯 덜거덕거려도 일소들은 쟁기를 끌고 밭골을 잘도 빠져나간다. 소와 농부, 땅과 쟁기의 호흡이 일치되는 순간이다.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쟁기 밥은 새끼 송아지를 찾는 암소의 음매 소리와 함께 밭골을 넘어 골짝을 휘감아 온다.
땅이 풍요의 여신이라면 쟁기의 보습은 건강미 넘치는 남성을 상징한다. 농부들은 쟁기질을 단순한 밭갈이가 아니라, 음양을 결합시키고 다산(多産)과 풍년을 기약하는 신령스런 행위로 보고 있다. 농부들은 지금도 소를 끔찍이 위하고 숭상한다. 소를 잘 길러 새끼를 많이 낳으면 집안이 번성하고 평안하다 믿고 있다. 소는 짐승이나 동물이 아니고 가족의 일부로 생각한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내 시골집도 그랬다. 할아버님은 암소 두 마리를 키웠다. 여느 집이나 매한가지로 소들은 구세주이자 목숨 같은 존재였다. 할아버진 어이된 일인지 경제권이 없었다. 모든 살림은 할머니가 쥐고 흔들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소는 할아버지 몫이었다. 소와 할아버지와 나는 자연스레 삼위일체가 되었다. 하교 후에는 소를 끌고 긴 뚝방이나 개울가로 가 배가 불룩해질 때까지 풀을 뜯어 먹이며 숙제도 하고 붉게 넘어가는 저녁노을을 보며 어린 꿈을 키웠다. 시골 장날엔 할아버진 소에 땔나무 바리를 싣고 팔러가곤 했다. 시간만 나면 할아버질 따라 오일 장 구경을 갔다. 장작 값을 넉넉히 받는 날엔 소머리 국밥을 사 주었다. 보리밥도 귀한 때였으므로 국밥 한 그릇은 임금님의 수라상보다 커 보였다. 어린 손자의 국밥 그릇은 곱배기었으나 할아버진 늘 보통을 시키고도 허리에 둘러찬 전대 만으로도 배가 부르다며 흐뭇해 하셨다.
시골 소년이 어찌어찌 해 서울 모 상고엘 합격했다. 촌에서 용이 난 것이었다. 그것도 잠깐, 입학금이 모자랐다. 등록날짜가 넘어 하루도 더 지난 후였다. 할아버진 소를 팔아 입학금을 허리 전대에 차고 교장실을 찾았다. 교장께서도 정성에 감탄을 했던지 입학을 허락했다. 그 날도 또 동대문 시장 국밥 한 그릇을 사주며 ‘소는 걱정 말거라.’ 열심히 공부해 큰 인물이 되라 했다. 그러나 서울 하늘 아래 고학이 그리 고분고분하던가. 겨우 2학년을 마치고 자퇴를 했다. 고생 끝에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을 때 할아버지는 손자가 선상님이 되었다며 온 동네를 자랑하고 다녔다.
성실, 근면, 검소, 정직, 인내, 책임감들은 암소만이 갖고 있는 성품이다. 평생 주인에게 충복을 다해 송아질 낳아 기르고 결이 질을 하다 천명이 다하면 죽어서도 모든 것을 인간에게 바친다. 몸뚱이는 물론, 뿔은 안경테로, 다리는 족발로, 뼈다귀까지 사골 국물을 우려내 사람의 기를 살려낸다.
그러나 정말 내가 일소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다. 사색을 반추(反芻)할 줄 아는 짐승이기 때문이다. 걸으면서도 생각을 하고 누워서도 사색을 한다. 걸으며 사색을 하자니 걸음이 느려야 하고, 누워서 생각을 하려니 반추를 할 수 밖에 없다. 시큼한 음식물을 위 속에서 다시 꺼내 되씹어내는 넉넉함은 소 같은 짐승만이 갖고 있는 여유로움이다. 눈을 감고 어기적어기적 씹어내는 참을성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나는 소를 닮아 행동이 굼뜨다. 벼락이 치고 소나기가 퍼부어도 어지간해선 뛰기를 싫어한다. 길을 가다가도 남들은 어떻게 사나 두리번거리고, 등산을 가도 맨 뒤꽁무니에 처지기 일쑤며, 여러 사람들과 식사를 할 때도 물 한 잔 따라 놓고 목을 축일라하면 밥도 못 먹고 일어서기 바쁘다. 행동거지가 느리다 보니 어린 시절 운동회 때 뜀박질상을 타본 기억이 없고, 군대에 가선 선착순을 하느라 땀께나 쏟아냈다.
또 밭가는 소리 듣는다. 지금 듣고 있는 저 소몰이 엉너리침의 긴 느림 새 울림은 아마 이 시대의 마지막 쟁기 보습을 끄는 소리가 아닐까 싶게 산을 돌아 고개를 넘는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기계화 시대에 트랙터와 경운기 소리 대신 사람 사는 소리를 듣게 되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옛날 할아버님이 손자를 부르던 그 목소리가 어제처럼 환청 되어 긴 밭골을 넘어온다.
큰 일물 되라던 어린 시절 꿈은 다 어딜 가고, 강원도 산골로 내려와 밭가는 소리 듣는가. 그러나 이 소릴 들어들어도 좋기만 한 것은 아직도 우심(牛心)이 몸 속 깊이 배어 있음에랴. 지금도 소가 좋아 소처럼 느림보 생활을 하고 있다. ‘천천히-더 느리게’란 하찮은 생활신조로 세상을 살아가며 명상과 사색으로 거듭 태어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소몰이 엉너리침과 워낭소리를 오래도록 들으며 인생을 더 곱씹고 반추해 내었으면 참 좋겠다.
고 윤희경 수필가의 카페 '윤희경의 산촌일기'에 2009년 8월 27일에 마지막으로 올리신 글이 작품 '소(牛)'입니다. 윤희경 수필가께서는 담도암 투병 중 2009년 9월 12일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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