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놀아라! / 조한금
핫저고리 핫바지 토시가 떠올려 지는 ‘대한’ 추위다. 더불어 아버지가 보고 싶어지는 겨울밤이기도하다. 내일은 영하 15도가 된다는데…. 늙으신 아버지는 까까머리로, 외출 땐 반드시 중절모에 두루마기를 입고 의관을 갖추셨다. 외출에서 돌아오신 아버지의 풀 먹인 옥양목 두루마기 자락에선 상큼한 바람 냄새가 났고, 아버지를 따라 들어 온 겨울바람 냄새를 나는 참 좋아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내음이기도 했다.
“소대한에 나가서 얼어 죽은 놈 제사도 지내주지 말랐단다.”
하시며 아버지가 바깥출입을 단속했던 그때는, 오로지 화롯불과 아랫목에 깔아놓은 이불 속이 난방의 전부였다. 바람이 문풍지를 귀신 울음소리처럼 울리던, 바늘구멍으로 황소바람 들어온다고 빨리 문 닫으라며 성화를 대던 그런 겨울이면, 나는 화롯불에 인두를 묻어놓고 아버지의 바지저고리에 솜을 놔 핫바지 저고리를 꿰맸다. 어린 나이에 서툰 바느질 솜씨로나마 내손으로 기워 입혀 드린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신사임당이 율곡의 스승이라면 아버지는 나의 스승이셨다. 모든 것에 어찌나 비유법이 좋던지 나는 아버지의 어록을 거의 다 외우다시피 했다. 지금도 가끔씩 “풋” 하고 웃음이 터져 나오는 말은
“미친년이 얌전 내면 걸레에도 풀 먹인다더니….”
하시며 조크를 주던 생각이 난다. 어쩌다 내 딴엔 잘 한답시고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서 그르쳐 놓았을 때 들었던 핀잔이다. 어디 그뿐인가.
“신개초리 시궁에 3년 박았다 꺼내도 매 한가지!”
라는 말씀을 자주 쓰셨는데, 충청도 사투리라 대충 말뜻은 알아들었지만 그 어휘가 이해가 잘 안됐었다. 그러나 어른이 된 후에 곰곰 생각해보니, ‘흰 개꼬리 시궁창에 3년씩 묻어 두었다 꺼내도 내내 똑같다’는 뜻인걸 알았다. 인간의 본질과 습관에 대한 비유의 가르침이었다. 이렇듯 행동마다에 대한 아버지의 교육법이랄까 지침서랄까, 나는 그렇게 길들여졌다.
아무리 급해도 참고 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의 비유로는
“의주 파발에도 호박죽을 시켜먹는단다.”
시며 파발마가 어명을 전하러 가는 급한 상황임에도, 김나지 않은 뜨거운 호박죽을 식혀 먹고 가는 여유를 가르치셨다.
“언 족에 식비, 언 발에 오줌 누기다.”
라고 하실 땐 어설픈 임시방편은 일을 더욱 그르치니 아니함만 못하다는 아버지식의 해석이었고, 추워서 옹송그리며 “추워라.!” 할라치면
“돈 많이 벌어놨냐. 추월이 찾게.” 하셨다. 무슨 뜻인지 잠시 어리둥절해 하면 ‘추월’이는 기생 이름이니 기생을 부르려면 돈이 많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웃으셨다. 이렇듯 위트와 유머가 있는, 사고가 개방된 신식노인에게서 경험에 의한 삶의 지혜를 많이 배웠다.
“우물파면 개구리 뛰어 든다.”
고 늘 말씀 하셨는데 개구리는 물에서 놀게 마련이라며 “네가 곧 우물이니 그 우물을 크게 파면 많은 개구리들이 그 우물에 뛰어 들어와 놀 것이다.”라며 일단 진행하고 보도록 추진력과 긍정적인 사고를 심어 주셨다. 그래서 남들이 힘들다는 그 IMF도 거뜬히 넘겼다.
처세법은 또 어떤가.
“삼색 벗, 오색 친구‘라 했으니 청탁을 가리지 말고 두루두루 사귀어라.”
고 이르셨는데 그래선 지 친정 오라버님은 8가지 색깔의 모든 분들과 층하 없이 교분이 두텁다. 아버지는 여성 다루는 법을 오빠에게 일러 주시면서
“옛날 어떤 선비가, 외출에서 늦게 돌아오니 부인이 온갖 욕설을 하며 바가지를 긁는데, 선
비는 못들은 척하고 부인 앞에 너부죽이 큰절하며, 부인 뵙시다. 오늘 별 일 없었지요?
그러자 부인은 한 술 더 떠, 미치려면 곱게 미치지 별 짓 다한다고 펄펄 뛰었단다. 선비는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여전히 바가지 긁는 부인 앞에 넙죽 절을 하니 이튿날은 엉거주춤
반 절로 받고, 삼일 째는 공손하게 맞절을 하더란다.”
하셨다. 악처를 양처로 만들어 사는 법을, 옛날 얘기를 곁들어가며 가르치신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여자의 머릿속은 얇은 계란 막처럼 되어 있어 조금 추켜세우면 기어오르고 조금 나무라면 쀼루퉁 해져 입 나온다며
“여자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 했느니 너무 가깝게도 멀게도 하지 말아야 한다.”
며 속 좁은 여성들의 행동을 꼬집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약 올랐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지금은 그 여성심리를 참고로 나를 돌아본다.
“비 온 뒤의 땅은 더 단단해 진다.”
며 시련 뒤의 성공을 얘기 하셨고,
“단단한 땅에 물 고인다.”
시며 절약해야 함을 이르곤 하셨다. ‘식은 죽 갓 둘러먹기’는 힘 안들이고 쉽게 하고자 했을 때 야단치는 비유요. 내게 면박 주시던 아버지의 독설(?) 또한 일품이셨으니
“썩은 바지게 구멍에 검은 개 주둥이 내밀 듯 쏙 나선다.”
고 어른들 대화에 못 끼어들도록 무안을 주시기도 했다.
입성교육은 또 어떠셨는가. ‘오리 알 제 똥 묻은 듯 만 듯 수수하게’를 수없이 강조하셨는데 그래선 지 지금도 고운 옷에 눈길이 자주 가는 것은 그때의 보상심리이리라.
‘곱게 놀아라.’ 하니 불컹 물(붉은 물) 들여 놀고, ‘높이 놀아라.’ 하니 간짓대 꼭대기에 올라가 놀더라며 엇나가는 아이를 비유로 교우관계를, 곱고 높게 놀라고 역설하셨지만 나는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
아버지의 교훈은 내 생활 전반에 녹아들었고, <개살구 모로 터진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 <목구멍으로 태산 넘어 간다.> 등등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그때의 그 잔소리가 오늘 내 지혜의 길잡이가 되었다. 그러나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지금도 그런 지혜와 가르침이 필요한데, 이제 어디 가서 배워 그 해답을 얻을꼬.
더더욱 절절히 아버지가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깜깜한 이 한 겨울밤이 지금 새벽으로 하얗게 새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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