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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空想)
-말도 안 되는 공상-
꽃집에 들러 장미 스물여섯 송이를 주문한다.
“흰색 망사 천을 받치고 예쁜 다발로 만들어 주세요.”
“성년 기념일에 선물하실 건가 보죠, 따님이세요?”
“예, 천 색깔까지 정해 주던데요.”
“요즘 아이들 대단해요. 개성도 강하고…, 부재료를 많이 쓸게요.”
안개꽃과 천을 부재료라 했다. 꽃송이들의 높낮이를 고쳐가면서 줄기의 끝자락을 가지런히 자르고, 망사 천을 여러 겹으로 싸면서 주름을 만드는 가게 아주머니의 손놀림을 한참동안 보고 있노라니 문득 머리를 스쳐오는 게 있다.
몇 해 전 일이다. 집안 어른이 사윗감을 놓고 의견을 물으셨다. 나는 그 혼인을 반대한다고 대답했는데, 장미 꽃다발이 반대의 이유였다. 만약 그 총각이 생화를 ‘스물여섯 송이씩이나’ 선물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굳이 그를 흠잡지 않았을 터이다.
어른의 말씀인즉, 총각은 인물도 괜찮고 직장도 든든하고 다 좋은데 단칸 셋방살이부터 시작할 거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단다. 그러던 중에 딸의 생일날 ‘놀랍게도’ 장미꽃을 ‘한 아름’ 들고 왔다는 것이다. 단칸 셋방살이는 할 때 하더라도 왜 듣기 싫은 소리를 미리부터 자꾸 하며, 그런 처지라면 비싼 장미를 나이에 맞춰서 선물하는 멋을 부려야 하는지, 딸을 좋아하는 것이 싫지는 않지만 헤픈 성격인 것 같아 걱정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오늘 나는 그때의 내 대답이 잘못된 게 아닌가하는 생각에 빠져든다. 지성(Intellect)과 감성(Sensibility)을 같이 가지고 있는 우리는 지성적으로 판단해야할 때 감성적으로 판단하는 우를 범한다. 그러나 감성적이어야 할 때 지성적이어도 판단을 그르치기는 마찬가지다. 그 날 나는 지나치게 지성에 의존하여 판단하려 했던 것이다. 그 장미다발이야 말로 ‘돼지우리에 주석자물통’이 아닌가라고, 사글세 타령만 해도 성실한 마음가짐으로 미리 다짐을 해두는 것이라고 좋게 해석하기에는 경솔한 언행이라며 나는 반대의견을 분명히 냈던 것이다.
그런데, 예쁘게 입을 다문 싱싱한 장미송이들과 흡사 웨딩드레스를 연상케 하는 깨끗한 망사 천들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을 보면서 매우 감정적인 기분에 빠져든 지금은 그 총각이 ‘때로는 사치를 사랑할 줄도 아는 성실한 젊은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분위기에 따라, 그가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정반대의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닌가.
꽃집을 나선다. 꽃을 좋아하신 어머니 덕분으로 꽃가게에 들르는 것에 조금은 익숙해져 있는 나였지만 고작 몇 송이씩 골랐을 뿐, 장미를 한 다발이 되게 사는 기분은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사실과, 요즘 세대들의 생일 꽃 유행에 대한 뒤늦은 이해, 예상보다 꽃값이 비싸지 않다는 것 모두가 나의 판단착오를 성찰케 하기에 충분하다. 길을 걸으며 인간의 불완전성을 생각한다. 조금은 화가 치미는 기분마저 느끼면서…
지성과 감성은 그렇다 치고, 이성(Reason)과 감정(Emotion)은 또 어떤가. 회사에서 급히 해결해야 할 일거리 두 가지를 한 부서에 지시할 때 나는 곧잘 동시진행을 주문했다. 조직의 일들은 대체로 정보수집, 상황판단, 중간보고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해결되므로 동시진행 방법이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논리가 그 근거였지만, 나의 그런 주문 속에는 둘 다 급한데 순서가 어디 있느냐는 , 감정적인 우격다짐도 섞여 있었다.
“어느 것부터 할까요?”라고 꼬박꼬박 묻는 친구에게 “닭도 필요하고 달걀도 필요해.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따질 시간이 없어!”라고 대답한 적도 있다. 이성적으로 보면, 창조론으로는 닭이 먼저이고 진화론으로는 달걀이 먼저임이 분명하므로 내 대답 속의 그 비유는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그만큼 그때 나는 감정적이었다.
다행이 이 경우는, 이성에 감정이 한꺼번에 작용하였어도 판단의 결과는 ‘동시진행’이라는 동일한 해답으로 나타났지만, 대부분의 일에 있어 감정이 개입되면 판단은 다르게 나오기 쉽다.
인간은 지능(Intelligence)을 가지고 태어나므로 누구나 지성적이지만, 오감(五感)을 가지고 있어 감성적이며, 육감(第六感)까지 가져 직관력도 갖추고 있다. 그런가하면 냉철한 사고력과 논리력이 있어 이성적인 반면, 감정의 동물이므로 감정적으로 행동하며, 그 내면에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세계까지 갖추고 있다. 그러니 인간은 참으로 위대한 존재이다. 그렇지만 또한 진정 종잡을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지성과 감성 및 이성과 감정이 어떤 상황에서나 일관되게 하나로 표출될 수는 없을까. 그 둘씩을 맷돌에 곱게 갈아 가령 ‘지감성’ 및 ‘이감성정’으로 가지고 있다면, 이 세상의 모순투성이들이 많이 사라질 텐데… 가루가 되어서도 따로 표출된다면 아예 그 둘씩을 화학적으로 합성하여 합성A(지성+감성), 합성B(이성+감정)로 소유하면 어떨까. 그렇다면 적어도 동일한 사물을 놓고 이제 다르고 저제 다른, ‘완전히 불완전한 ’ 판단이 나오지는 않을 텐데…. 위대한 인간이 지금 하염없는 공상을 하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신 것은 부당한 판결도 법에 의한 것이므로 지켜야한다는 신념 때문만은 아니었다. 또한 도망이라는 비열한 행위는 악이므로 자신이 악의 영역에 설 수 없다는 덕성 때문만도 아니었다. 그는 영혼의 불멸을 믿었고, 죽음은 육신의 감옥에서 영혼이 해방되는 것이므로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또 다른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혼 불멸에 대한 신념은 그의 뛰어난 감성(직관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영혼 불멸의 감성적 믿음을 철학적 지성으로 증명해 보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제자들 뿐 아니라 가장 절친한 친구 크리톤에게 조차도 그것을 믿게 하지는 못하였다.
한편 그의 뛰어난 지성적 사고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면서, 그를 서양 합리주의 철학의 시조가 되게 하였다. 그는 감성에서나 지성에서나 탁월하였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지성을 뛰어넘어 감성으로 먼저 믿을 수 있기 위해서는 ‘합성’으로는 불가능하며, 지성으로 사고의 꽃을 피워 결실을 맺기 위해서도 ‘합성’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이질적인 두 성분이 합하여 상호 중화가 되면 감성의 극대화와 지성의 극대화는 둘 다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합성되면서 상호 시너지효과를 나타내어 준다면 모르겠지만, 그건 합성되기 전보다 양적 팽창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내 공상의 범위를 벗어난다. 공상이 자꾸 범위를 벗어나면 그 다음 나는 아마 정신과 의사에게 가야할지 모른다. 말도 안 되는 공상, 그렇지만 공상은 재미있다.
더위 먹은 공상… 삼복더위에 횡성수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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