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매화(風媒花)
鄭 木 日
바람아, 너에게 일생을 맡긴다.
한 번 스쳐가고 말 뿐이라도 제발 한 번 지나가길 기다린다.
풍매화는 간절하게 바람을 기다린다. 잎보다 먼저 피는 봄꽃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고 장미, 모란이 농염하게 계절을 빛내지만, 풍매화는 바람을 기다릴 뿐이다.
꽃은 절정, 최상, 최고를 뜻한다. 어느 꽃인들 일생의 집중력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지 않을 것인가. 꽃으로 피어난 이상, 오래 동안 자신의 모습을 뽐내려 한다. 꽃자리에서 내려서고 싶지 않다. 찬사와 경이의 눈으로 자신을 기억하길 바란다.
풍매화는 일찍 지길 원한다.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을 뿐이다. 누구나 일생에 한 번 오르고 싶은 절정, 꽃자리를 마다하는 꽃이 있을까만, 바람이 좋은 날을 기다리는 풍매화다.
언제나 청청한 기상을 보여주는 소나무, 잣나무의 꽃, 황홀한 단풍을 보여주는 느티나무, 은행나무의 꽃이 풍매화이다. 인류에게 식량이 돼주는 어머니 같은 보리 벼 옥수수 꽃이 풍매화이다. 내가 좋아하는 나무이며 곡식들이다.
풍매화는 꽃을 자랑하지 않는다. 꽃의 크기가 작고 빈약하다.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꽃은 녹색이거나 흰 색이고, 가벼워 바람에 잘 날려가도록 생겼다. 벼 옥수수 꽃은 녹색의 작은 귀걸이처럼 대롱거리고 있다가 바람에 날려가고 싶어 한다. 소나무는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다. 소나무 수꽃은 송화 가루라 불리는 노란 색 꽃가루로 덮인 기둥모양을 취하고 있다.
풍매화를 보면 운명과 일생은 바람에 휘날리는 꽃가루라는 것, 일장춘몽(一場春夢)임을 절감한다. 바람이란 무엇일까. 관계를 맺기 위한 동기이고 과정이 아닌가. 바람은 움직이고 변하는 것이며, 운명과 생명도 그러한 것이 아닌가.
모두가 꽃자리에 앉으면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한다. 권좌나 절정에 서면 언제나 그 자리에서 군림하고 싶은 게 꽃의 욕망이다. 더욱 농염하고 싶고 짙은 향기로 아름다움에 취하게 하고 싶어 한다. 찬사와 숭배를 받고 싶어 한다.
꽃의 사명은 무엇인가. 열매를 맺기 위해 피어났다. 아름다움에 도취되면 사명을 망각하기 쉽고, 꽃자리에서 물러날 때를 잃는다. 꽃이 필 때가 아름다우면 질 때도 아름다워야 한다.
풍매화는 울긋불긋 화려한 치장으로 벌과 나비를 불러 모으지 않는다. 모든 것을 한 점의 바람에 내 놓을 뿐이다. 필 때보다 질 때를 기다린다. 결실과 미래가 더 튼실하고 아름다운 삶을 바란다.
꽃이 눈부신 장미나 모란보다도 소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가 더 아름답고 경이로운 것은 아낌없이 꽃을 내어 놓을 줄 아는 풍매화를 피우기 때문이다.
‘대한문학’(2007. 가을 호) ‘권두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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