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와 농민
요즈음은 새로운 바람 냄새에 창 밖 세상이 더 그리운 나날이다. 가을빛이 만들어 낸 새로운 모양을 찍고 싶고 까치들의 경쾌한 노랫소리도 듣고 싶어 시리도록 눈부신 햇살에 빨려 유일한 쉼터인 약수터로 향했다. 한 낮이라 낮 잠 자는 시간일까. 산비탈을 끼고 가파른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도 기대하던 까치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고 언덕배기에 앉은 허름한 집 쪽에서 개 짖는 소리만 아우성이다.
산이 울릴 듯 이방인을 경계하는 개 짖는 소리에 멈칫 겁이 나면서도 기분은 참 좋았다. 탁 트인 산야, 발걸음 소리를 줄여가며 주춤거리다가 좀 수그러드는 짖음 소리에 천천히 내려가니 맑은 물이 조용히 흐르는 작은 골짝이 있었다. 뜻 밖에 만나 더 반가운 골짝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한 낮 햇살이 목욕하는 은빛 물 속은 실핏줄까지 선명했다. 들여다볼수록 눈이 부신 골짝 물에 반쯤 잠긴 돌을 딛고 쪼그리고 앉았다.
먼지를 턴 손을 살며시 담가봤다. 온기가 느껴지는 물 속은 참 시원했다. 이름 모를 작은 나비들의 나풀거림을 의식하면서도 담근 손을 빼지 못하고 한 참을 살피며 기다려도 오질 않는다. 착각이었을까. 물 위를 걷는 물거미라도 보고 싶었는데 좀 아쉬웠다. 창 밖 세상의 미세한 흔적까지 소홀히 대해지지 않는 족쇄의 삶은 매사 그리움의 빛이라 자연이 궁핍한 일상에는 몇 시간만의 사색이라도 새로운 활력소다.
실팍한 고추 포기를 안고 선 지지대에는 고추잠자리가 장악하고 있는 가을 한 낮, 앙증한 고추잠자리는 햇살이 뜨거운 듯 미동도 없다. 낮은 마음으로 살지는 고추가 가을볕에 뜸 들이는 넓은 고추밭을 끼고 조금 돌아가니 파 밭 고랑에서 연로하신 할머님이 수북한 대파를 다듬고 계셨다. 할머님 머리 빛깔 같은 파뿌리가 뭉뚝 잘려나간 굵은 대파 줄기는 우윳빛으로 먹음직스러웠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파가 어쩌면 이렇게 굵어요? 참 잘 키우셨어요. 이렇게 실팍하게 키우시기에 힘 많이 드셨지요?” 피식 웃으시며 “오늘 공일이라 손자 녀석이 차를 가져와서 보내려고...” 하시는 작은 체격의 할머님, 핏줄이 두드러진 손등에 세월의 테가 바위 꽃처럼 짙은 할머님, 처음 뵙는데도 이웃 같이 따뜻하게 대해 주시는 할머님, 무릎 가운데 얼굴을 묻고 앉은 모습이 너무도 나약해 보여 참 안쓰러웠다.
저 어르신께서도 젊으셨을 때는 초봄 죽순 돋아나듯 힘찬 패기였으련만, 늦가을 된서리 맞은 오이넝쿨 같은 모습을 뵈면서 야속한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케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할머님 허락을 받고 텃밭 둔덕으로 올라가니 크고 작은 개집이 줄져 있는 가건물 같은 집 앞에 밤송이가 유독 큰 밤나무가 서 있었다. 그리 높지 않은 밤나무에는 주먹만한 밤송이들이 가지가 휠 정도로 탐스러웠다.
그늘진 쪽 밤송이는 아직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고, 따가운 햇살 눈총에 입이 쭉쭉 째진 밤송이는 상가지마다 몇 송이만 달려있었다. 며칠 전부터 꼭 찍으리라고 기대하던 메뉴, 웃는 밤송이를 한 컷 한 컷 포착 할 때마다 그 설렘의 성취감은 색다른 포만감이었다. 매순간 얼마나 행복하던지, 고마운 사진기에 입맞춤을 주고 찾아 올라간 텃밭 둔덕을 행복한 마음으로 되돌아 나오는데 깜짝 놀랐다.
찢어진 하우스 귀퉁이 여기 저기 죽어 널브러진 까치들이 눈에 띄었다. “할머니 죽은 까지가 여기 저기 많던데 왜 죽었을까요?” 그 놈들이 봄이면 씨앗을 빼먹고 여름이면 넝쿨도 끊어 놓고 열매도 파놓고 먹는 거라면 가만 두는 게 없어 약을 놓았다고 하셨다. 오죽했으면 극단의 처방을 내렸을까 싶은 농민의 고충도 알 것 같고, 먹이를 찾느라 씨앗 뿌린 밭을 막무가내 헤집는 까치도 이해가 됐다.
이른 아침 경쾌한 까치의 지저귐은 반가운 집배원이던 귀염둥이가 아니었나. 영문 모를 죽음에 여기 저기 널브러진 까치가 가워였다. 그렇듯 기다림의 소식통이던 까치가 이제는 해조로 농민들에게 홀대를 받는다니 약자인 모습에 마음이 더 아팠다. 처참하게 흩어져 있는 까치 중에 제일 작은 까치를 묻어 주기로 마음먹고 열매가 달린 떡갈나무 잎사귀를 주섬주섬 한 아름 모았다.
김장거리 배추가 파란 꽃처럼 예쁘게 자라는 배추 밭이랑은 흙이 부드러웠다. 포실한 밭이랑 한 쪽 끝을 널찍하게 파내고 떡갈나무 잎사귀를 가지런히 깔고, 그 위에 가여운 까치를 편안히 누이고 떡갈나무 잎사귀를 덮어 고이 묻어 주었다. 남은 떡갈나무 잎사귀는 무덤 위에 꼭꼭 덮어 주고 내려오는데, 영문 모른 죽음에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잃은 처참한 까치들 모습이 눈에 밟혔다. 까치와 농민, 피차간 피해로 아픔을 주지 않은 화해의 처방을 없을까.
2006. 09. 10.
원화윤
* sysop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10-09 08: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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