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버선본
李振英
휘어질 듯 부드럽게 내려오던 곡선이 한번, 하늘을 향해 다소곳하던 고개를 살포시 쳐든다. 도도한 듯도 하나 결코 수줍음을 접지 않은 자태가 기품 있는 여인네의 몸가짐과 견줄만하다. 다시 앞부리와 발뒤꿈치를 감싸주는 완만한 곡선에서 발목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선은 고단한 여인네들의 삶을 감싸 안는 포근함이 배어있다. 일필(一筆). 동양화의 붓끝처럼, 직선 보다는 휘어짐이 멋스럽다. 날아갈 듯 하늘로 오르다가 허공에서 한 번 접고 돌아선다. 자기가 그은 선을 끝까지 갈무리하는 마음가짐이다. 지름길이 아닌 돌아감의 여정에서 바라보고 음미하며 한 가닥 멋을 창출해낼 수 있는 여유로움을 안고 있는 듯하다.
어머니의 버선본이다. 지난 번 이사 때 묶은 짐을 정리하면서 모서리 조각이 떨어져 나갈 듯이 낡아버린 반닫이 안 깊숙한 서랍에서 오래된 투박한 가위 하나와 차곡차곡 접은 누런 빛깔 버선본을 찾아냈다. 언제인가 어머니가 새색시 적에 발 맵시가 특별히 예쁘게 나온다며, 어느 친척분이 그려주었다는 그 버선본이다. 몇 번이고 졸라서 얻어냈다던 버선본. 6․25 전쟁 피난길에도 다른 짐은 못 챙겨 넣어도 버선본만은 짐 속에 간직했다고 하시며 소중히 여기시던 거다. 하지만 오랫동안 바람을 쏘이지 못한 채 몇 겹으로 접힌 자국마다 지난 세월이 깊숙이 스며들어 힘없이 흐느적거린다.
그 버선본을 몇 번이고 펼쳐보고 또 쓰다듬어 보고 하노라니 흐릿한 시야에 애틋한 그리움의 창이 소리 없이 열리면서 젊은 어머니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꼿꼿한 광목을 반듯하게 펼쳐놓고 그 위에 버선본을 얹고 조심스레 마름질하신다. 서걱서걱 선을 따라 가는 가위 소리는 단순한 자름이 아니었다. 완성을 향한 과정의 동참이기에 장단을 맞추듯이 흥이 났다. 홈질, 박음질, 솜을 두고 안팎을 뒤집고 공그르고, 인두로 솔기마다 꼭꼭 눌러 맵시 있는 버선을 만들어내던 어머니의 섬세한 손길에, 어린 나는 좀처럼 눈길을 떼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 버선본으로 한평생 버선을 만드셨다. 모처럼의 여름 나들이에도 잠자리 날개같이 꼿꼿한 생모시옷 차림에 외씨 같은 솜버선을 신으셨다. 먼저 부드러운 헝겊으로 발을 감싸고 좁은 버선목으로 힘을 주어 억지로 발을 밀어 넣고 다시 그 위에 겉버선을 신고 마무리 하신 후, 그 날렵한 맵시를 앞뒤로 돌아보며 흡족한 미소를 띠시곤 했다. 왜 그리 힘들게 신느냐는 나의 걱정스런 물음에, 여유로워 쉽게 신고 벗을 수 있는 버선은 맵시가 안 난다하며, 빡빡하여 힘들게 신어야 도톰하게 발 맵시가 난다고 하셨다. 또 한복은 겉옷보다 속옷이 겉모양을 좌우한다고 하시며, 하얀 버선과 속바지, 그리고 속치마 말기가 가슴 품을 잘 감싸서 정돈되어야 입은 사람도 편하고 맵시도 한층 뽐낼 수 있다하셨다.
어머니는 하루 일을 마친 저녁 무렵이면 조각 천을 대고 해진 버선을 기우셨다. 또 해진 버선뿐만이 아니라 성한 버선에도 미리 볼을 박아놓기도 하는데, 뾰쪽한 바늘 끝으로 올을 따라 쭉 선을 그어 표시를 해놓고 볼에서 한 올 뜨고, 버선에서 두 올 뜬다. 그렇게 한 올 한 올 감침질하는, 손매가 야무지다는 어머니의 기운 버선 맵시 또한 어느 곳 하나 울지 않고 보기 좋았다. 그러나 기운 것이 어디 버선뿐이겠는가. 해진 버선을 기우 듯이, 시집살이 상처 나고 고단한 하루도 지혜롭게 감싸 그렇게 말끔하게 기우셨으리라.
예전엔 맵시 나는 버선을 신기 위해서 행여 박음질한 부분이 터질까봐 솔기에 침을 발라가면서 방을 몇 번씩 빙빙 돌아야할 정도로 힘이 들었단다. 벗을 때 역시 힘센 하녀가 잡아당겨주면 뒤로 함께 나자빠질 정도였다고 하니 과히 그 어려움이 짐작된다. 또한 신은 후의 발을 조여 주는 답답함을 견디어냄도 스스로를 규범과 가정이라는 속박에 단단하게 묶어두려는 옛 여인네의 깊은 속내가 아닐까. 당시에는 그리 잦지 않은 여인네들의 바깥나들이였기에 버선 속에 갇힌 발 또한 인내하며 견뎠겠지만, 한 장 고이 간직한 빛바랜 버선본은 어머니 평생 가는 길에 흐트러짐 없는 반듯한 지표였던 듯싶다.
발을 조여 주는 것처럼 마음을 조이고, 남편에게 조차도 함부로 내보이지 않고 꼭꼭 감싸 가리는 것처럼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던 여인의 삶. 흡사 한 장의 버선본을 놓고 평생 자신의 발걸음을, 넓지도 않고 좁지도 않고 그렇다고 길지도 짧지도 않게, 그렇게 알맞게 재단하듯이 틀에 박힌 일상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었던 삶. 그래도 자신과 가문을 지킬 수 있었기에 아름답고 소중하다 여기면서 사셨으리라.
어머니 세상 뜨신 후, 모두 다 버리기에 너무 아쉬워서 겨우 몇 켤레만 남긴 어머니의 무명 버선과 한 평생 간직한 버선본. 이제는 그마저 지난 시간 갈피 속에 아득히 묻어 두어야만 하는가. 하지만 그 버선본에 담긴 여인 네 들의 넘치지도 모자람도 없었던 반듯한 삶의 지표와 인내하며 자신을 다스리던 지혜만은 소중히 간직하고 싶다. 윤이 나게 아른거리는 대청마루 위에서 툇돌을 밟고 뜰로 사뿐히 내려오시던 어머니의 하얀 버선발, 그 고운 자태와 함께.
[수필시대] 2006 11/12 통권11 '이 작가를 주목한다'
* sysop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12-31 17: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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