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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그 눈부심 때문에 더욱 고독하다
유희남
나는 오늘 별을 보았다.
그토록 오랫동안 바라보며 안타까이 동경해 온 수필계의 큰별, 피천득 선생님.
그 영롱하고 푸른 별을 만나기 위해 나는 한 달 내내 앓았다.
「수필과 비평사」와의 원로 작가 대담 프로그램을 수락한 후 어떻게 그분을 만날 수 있을 지 피 마르며 고생했었다. 우선 이 특집이 처음으로, 가정 먼저 모시고 싶은 분은 피천득 선생님이었기 때문이다.
전에 이미 읽은 바 있는 <인연(因緣)>이란 수필집을 밑줄을 그으며 정독했다.
어떻게 해야 그 고고하고 정렬한 영혼 곁으로 다가갈 수 있을지...... 나는 소심하여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 막상 피 교수님을 만난 순간 문득 간디가 연상된 것은 무슨 연유인가. 지혜와 인자함이 가득 밴 그 미소와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모습에서,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를 떠올렸나 보다.
TV나 신문 잡지사의 인터뷰 요청에 거의 응하지 않으시는 금아 선생님은 그동안 오직 작품으로만 뵈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금강석같이 빛나는 작품을 낳은 작가를, 나는 작품으로만 늘 목말랐다.
언젠가 꼭 한번은 만나뵈리라. 언젠가는 내 찾아가 뵈리라. 그것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내 젊은 날의 커다란 희망으로 자라고 있었다. 특히 어느 부분은 암송까지 할 수 있는 작품들 <수필>, <구원의 여상>, <시골 한약방>, <5월>, <가든 파티>, <엄마>, <플루우트 연주자>, <잠>, 이런 명수필을 다시 읽게 될 때마다 선생님께서 더 연로하시기 전 찾아뵈어야 한다고 늘 조바심치곤 했었다.
나는 아직 그 어떤 작가도 이렇게 그리워하며 내 발로 먼저 찾아가 뵌 적이 없다. 물론 소심하고 게으른 탓도 있지만, 윤오영, 이양하, 노천명 같은 분들이 살아 계신다 해도, 여전히 희망사항으로 머물고 말았을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마치 의연한 결단이라도 하듯 그토록 꿈꾸어온 이 모험(?)을 감행했다.
선생님을 보다 쉽게 만나기 위해 지난 5월 서울대 동창들이 차려 드리는 미수연(米壽延)엘 찾아가 이미 낯익히기를 한 셈이다. 선생님과의 인연을 더욱 필연적인 것으로 하기 위해 8년 전 내 첫 수필집 <삶의 향기 바람에 날리며>를 보내드린 것을 상기시켜드리고자 애썼다.
나는 그 수필집에 실린 <4월>이란 작품에서 사십이 넘은 사람에게도 봄이 온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인가라고 표현한 피천득 선생은 얼마나 선량한가 나는 그 관조와 달관의 철학이 부럽다라고 쓴 바 있었다.
그건 내 처녀 수필집이다. 발간 즉시 우송하여 드렸는데 그 책을 받아보신 금아 선생님께서는 학교로 감사의 전화를 주신 바 있다. 하지만 8년이란 세월의 힘은 얼마나 무서운가.
나는 아프리카 희망봉이 원산지인 아가팜샤쓰 꽃을 예쁘게 묶어 카드와 함께 들고 갔었다. 다행히 제자인 교장 선생님의 소개로 선생님과는 매우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었고 몇 장의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그 꽃의 꽃말이 사랑의 방문임을 선생님은 아실까? 그러나 정작, 그 미수연은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얼마나 긴장했던가. 그러나 막상 선생님을 대하는 순간 나는 마치 무장 해제되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 소박함은 자신감에서 연유하는 달관의 경지라고나 할까.
마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언제라도 홀연히 작별인사를 할 수 있는 사람처럼 선생님의 거실은 깔끔하고 조촐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 분의 생활관이 느껴지는 정갈함이었다.
금아(琴兒)라는 호가 정말 잘 어울린다고 나는 느꼈다. 마치 거문고 타는 소년처럼 그늘이 없이 선생님은 여유로워 보였다. 모든 세속적 욕망과 물욕과 집착을 벗어버린, 편안하고 고요한 관조의 모습은 마치 신선같다고나 할까.
고요하나 생기 있고, 적요하나 가득찬, 그리고 가벼우나 충만한 그 분위기는 얼마나 평화로웠던가.
약속된 시간보다 20여분 빨리 도착한 나는 차 속에서 많은 질문들을 곱씹어 보았다. 그러나 그 질문들은 모두 부질없는 공허한 것이었다.
1분 전에 초인종을 눌렀는데 선생님은 이미 다탁 위에 오렌지 쥬스 2잔을 준비해 놓으시곤, 벨을 누름과 동시에 손수 문을 열어 주셨다. 나는 그 가식 없는 만남에서 갑자기 무장 해제를 당하는 듯이 편안해질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같은 유전인자나 문화인자 또는 기질이나 특성 같은 공통분모를 너무 많이 발견했다는 말과 유사하다. 그래서인지 나의 질문은 종횡으로 아무 거리낌 없었고, 피교수님 또한 조크와 회고담이 알맞게 버무려져 아이처럼 즐겁게 답변해 주셨다.
선생님과의 만남은 내가 예정했던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더한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무려 세 시간이나 이루어졌다.
우리는 문학, 수필, 여인, 사랑 그리고 삶과 인연들에 대하여 담소했다. 점점 신명이 난 나는 선생님께서 손수 꺼내다 보여 주시는 많은 편지들과 그림들, 그리고 작은 소장품들을 신기하게도 그 대부분은 모두 값나가는 물건이 아니라 정신적 가치로 충만한 것들이었다.
나는 마치 화담 서경덕 선생을 찾아간 황진이처럼 독자는 잠시의 착각을 널리 용서해 주시길 - 금아 선생의 높은 학문과 예술적 향취에 빠질 수 있었다.
특히 서재에 있는 묵은 책장과 손때 묻은 낡은 원서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피에타, 슈바이처, 베토벤, 노신, 도산 안창호, 잉그릿드 버그만의 사진은 여러 장이 붙어 있었다.
아! 나는 거기서 참으로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님도 나처럼 잉그릿드 버그만의 팬이셨다. 나는 거의 광적일 만큼 그녀를 좋아했는데 선생님도 역시 사진을 걸어둘 만큼 좋아한다고 하셨다.
나는 순간 정말로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여름 이불과 겨울 이불을 갈아서 덮어주셨다는 그 난영(인형)이가 모서리 의자에 앉아 있었고, 따님 서영 씨가 학술대회에서 강연했던 포스터가 벽에 붙어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가장 가치있는 정신적 발자취처럼 내 마음을 정결하게 해주고 있었다.
다시 찻상 앞으로 돌아와 이번에는 선생님의 작품세계를 여쭈어 보았다. 선생님 작품 중에서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가장 아끼는 작품이 무어냐고 여쭈었더니 <종달새>라고 하셨다.
내가 기억의 갈피를 헤매는 것을 눈치챈 그분은 아까 사모님께서 사오신 <인연>이란 수필집에 싸인을 해주시곤 <종달새>를 크게 읽어 보라고 하셨다.
나는 아버지 앞의 초등학교 학동처럼 <종달새>를 소리높이 읽었다. 그리고 그 작품을 가장 아끼시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종달새처럼 자유를 희구하는 정신과 어떤 역경 속에서도 더 높이 멀리 날기 위한 이상을 향한 동경 -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바로 자유이며 정의임을 낭독하게 함으로써 깨우쳐 주신 셈이다. <종달새>는 인간의 구원한 가치는 바로 그 자유의 정신임을 제시한 명작이었다.
이번에는 <로이트 박물관>을 소리내어 읽어보라고 하셨다.
이 작품은 일본의 호전적 국민성과 우리 민족의 예술성이 잘 대비된 교훈적 작품이다. 너무 쉽게 분노하고 빨리 용서하며 역사를 잊어버리는 이 땅의 백성들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가르침이 거기 숨어 있었다.
한 지식인으로서 그 당시엔 고작 이런 글을 쓰는 것이 항일이며 독립운동일 수밖에 없었던, 문약한 지성인으로서의 번뇌와 자괴를 추억하시며 선생님은 가볍게 한숨지으셨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 너무나 큰 나라 사랑이 숨어 있음을 나는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소환되지 않은 이 문화 시절들은 얼마나 나를 따라오고 싶었을까? 라고 쓰여진 부분에서는 가슴이 아리고 눈물이 솟을 듯하여 몇 번이나 마른 침을 삼켰다. 나의 이런 가슴 벅참을 아셨는지 이번에는 선생님께서 내 수필집 속에서 <4월>을 읽어 달라고 하셨다.
나는 폭포수처럼 소리내어 읽어드렸는데 다 듣고 나신 선생님은 아름다운 글이라고 칭찬해 주셨다.
나는 행복했다.
꿈엔들 상상이나 해 보았으랴. 원로 대작가 앞에서 감히 내 작품을 읽어드리는 영광을 가져 볼 줄을, 정말 살아 있는 동안, 최고의 환희와 영광을 맛본 순간이었다. 선생님께서도 흡족해 하셨다.
흥이 도도해지자 선생님께서는
“이런 때 내가 술을 한 잔 할 수 있으면 우리 유 선생과 멋있게 대작을 하고 싶건만” 하셨다. “하지만 난 정말 오늘 행복해요.” 라고 두 번이나 말씀하셨다.
과작으로 알려지신 선생님은 작품마다 수필의 정수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매체를 거의 타지 않으시는 이유를 여쭈어 보면서, 어쩌면 그 답은 거의 성직자와 같은 절제된 삶과 예술에 대한 높은 자긍심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20년 전부터 이미 글을 발표하지 않아요, 그 이유는 전에 쓴 작품수준을 유지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늙으면 잊혀질까 봐 기를 쓰고 모임에도 나가고 안타까워하고 두려워하는데... 그러나 글을 멈춰야 할 때 멈출 줄 알아야 합니다. 서양 속담에 늙으면, 침묵하거나 살롱에 나가라는 말이 있지요, 이 말은 늙어서 좋은 작품을 낳을 수 없을 바엔 작가는 차라리 침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라고 하셨다.
나는 그 순간 온 몸에 서늘한 그 무엇이 지나감을 느꼈다. 바로 그거다. 저 무서운 장인정신, 거의 성직자와 같은, 또는 구도자와 같은 절제된 삶에서도 알 수 있는 높은 자존심은 매화 향기 그윽한 선비의식이기도 했다.
그 말씀은 이형기 시인의, “돌아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시구처럼 이마를 때리는 죽비(竹扉:스님들이 강속이나 참선하실 때 쓰는 도구) 같았다.
수필의 주옥만을 내놓고 푸르고 도도하게 빛나는 그 이유는, 바로 저러한 장인정신과 고집스러운 정결함에 있는 것 같다. 그 수재들을 압도했다는 명강의와 높은 학문적 경지는 그 분이 겸손함으로 낮게 깔린 저녁 안개처럼 젖어들게 할 뿐 튀지 않는 고즈넉함을 풍기셨다.
자녀도 훌륭히 성장시켜 물리학자인 따님 서영 씨는 학계에서 매우 활약이 크고 사위도 노벨상 수상 대상감임을, 또한 사업을 하는 장남, 중앙병원 의사인 차남... 그리고 선생님 곁에서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내조해 오신 부인은 까트리느 드뇌브의 늙은 모습처럼 고아하고 정결한 여인이었다.
그분은 수필만이 아니라, 현실 삶도 그 수필만큼 완벽하게 살기를 추구하신 것은 아닐까?
허세나 물욕이나 공명심 따위는 아예 애초부터 배제되어 온 그 분의 집에서 충분히 느껴졌다. 특히 <금반지>라는 작품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왜 그랬는지를 알 것 같았다.
작은 것, 진실한 것, 소박한 것, 정직한 것들의 가치가 피교수님의 언어가 스치기만 하면 제 빛깔과 향기를 가지고 명징하게 살아나 가슴을 파고드는 이유, 그것은 암, 그 분의 인품이 배어난 때문이리라.
선생님은 나에게 선물로 주실 책을 사오라고 사모님께 서점엘 다녀오시라고 했었는데, 내가 땡볕이라 송구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자. 저 양반도 하루에 조금씩 걸어야 해요 하시면서 다정히 바라보신다.
나는 그 정결하고 깔끔한 아파트에서 아름답게 늙은 부부의 모습을 보았다.
아름답게 늙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 귀한 것인가! 부부가 오랫동안 해로하며, 자녀를 훌륭히 키워낸 후 노후를 그처럼 소박하고 여유롭게 보낸다는 것은 수많은 교육 이론서보다 더 값진 삶의 지침서가 아닐까.
이렇게 모든 가치가 다 붕괴된 세태에서 존경하고 흠모할 만한 어른이 계신다는 것은 우리들의 축복이다.
늙어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더없는 축복이다. 젊은 날의 추억들을 그대로 다 간직하고 계신다는 것은 또 얼마나 엄청난 부자인가.
선생님은 오후 5시가 넘자 나에게 “화장실에 다녀오고 싶으면 어서 다녀와요”하신다.
이렇게 자상하며 섬세하시니까 <모시>, <구원의 여상> 같은 고운 수필을 낳을 수 있으셨으리라. 그 페미니스트적인 기질을 내가 살짝 언급하면서 선생님이 살아오시는 동안 진정한 구원의 여인은 누구였느냐고 여쭙자,
"서영이가 방파제 역할을 해 주었어요. 그러나 누군가가 나에게도 방파제를 뛰어 넘는 파도가 있을 수 있다고 한 얘기는 지금 생각해도 재미있는 말이지요" 하셨다.
나는 아직, 선생님의 청춘이나 젊음은 꺼진 것이 아니고, 마그마처럼 숨어 있음을 느꼈다. 그 조용하고 아름다운 정열은 너무 차고 맑아서 오히려 안으로만 연소할 수밖에 없는 불꽃이 아니었을까.
차고 시린 별, 선생님을 젊었을 때 뵈올 수 있었다면 문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충분히 사랑하고 싶은 대상이었으리라.
언제나 내 자신이 가짜 문인이며 가짜 수필가라는 자괴감이 선생님의 삶을 엿본 후에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금아 선생님과 헤어져 나오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었다.
아마 선생님께선 보지 못하셨으리라. 노란 티셔츠를 입으신 선생님의 손을 흔들어 주시던 모습이 사라진 후 내가 눈물을 닦은 것을.
내 어찌 하여 저 젊고 푸르렀던 때에 선생님께 다가오지 않았었을까.
언젠가 퇴근길에 타는 저녁놀이 너무 아름다워 차창에 기대어 운 적이 있었다.
나는 금아 선생을 뵙고 온 후 이 글을 쓰는 동안 내내 앓고 있다. 별은 그 눈부신 빛 때문에 더욱 고독한지 모른다. 그러나 그 별이 있어, 사막의 외로운 나그네는 길을 찾는다. 그래서 좋은 수필은 외로운 현대인들의 길잡이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한국 수필사의 큰 별 피천득 교수님. 그 별빛 더욱 영원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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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희남 :( ~2001) 강원 춘천 태생. 성신여사대 졸업. 연세대 교육대학원 졸업. 1988년 <한국수필>로 등단. 새천년 한국문인상 수상, 수필집<삶의 향기바람에 날리며> 와 장편소설 <아카로스의 노래>상하권. 삶의 진실을 밝히는 초감성의 서정수필을 많이 발표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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