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가는 눈물
유해자
“요즘 아이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아요. 냉혹한 현실이 눈물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죠.”
10대들의 탈선과 아픔을 다룬 ‘눈물’이란 제목의 영화를 찍은 젊은 감독이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장면에서 여인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여인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조르르 떨어져 내린다. 눈물을 ‘여인의 보석’이라던가 ‘다이아몬드의 물’이라고 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은 어설픈 감상에 젖어 눈물을 질금거리는 여자보다 적극적이고 이성적인 여성이 아름다운 시대라고 한다.
몇 년 전, 수필 공부를 할 때였다. “자신이 하나의 섬인 채 또 다른 섬들에게 다가서려 서성이는 인간의 고독”에 대하여 쓴 Ｂ선생의 글이 그 날의 교재였다. 그 글을 낭독하던 K의 목소리가 젖어갔다. 글의 내용이 자신의 심정과 같아서 몹시 공감이 간다며, 현대인의 고독과 단절된 인간 사이에서 오는 외로움을 이야기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그 날 K의 눈물을 보며 난 갑자기 그녀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해가 넘어가는 시골의 여름 저녁. 인가에서 조금 떨어진 신작로 가에 앉아 돌멩이를 모아 놓고 공기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또 다른 장난이 하고 싶었다. 누군가 “우리 한 번 거짓으로 울어보자”고 제안을 했다. 서넛의 또래들은 “잉, 잉, 잉” 우는 흉내를 내었다. 거짓울음을 한참 울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저녁놀이 사라지고 어둑해 가는 하늘에서 미루나무 꼭대기 위로 짙은 잿빛 구름이 조용히 내려오고 있었다. 오롯이 어둠에 물들어 가는 허공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 속에서 무엇인지 모를 슬픈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난 그만 정말로 울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엉, 엉, 엉” 소리를 내며 서럽게 울어대자 슬픈 느낌은 사라지고 야릇한 희열이 느껴졌다. 일찍이 체험한 눈물의 카타르시스였다.
여자는 조그만 충동에도 언제든지 눈물이 흐르게끔 준비되어 있다고 했던가. 결혼식장에서 웨딩마치를 들으면 갑자기 눈시울이 후끈해 지는 것은 고질병으로 치더라도, 아무도 없는 한낮 혼자 식탁에 앉아 밥을 먹다가 “세상에 그 무엇이라도 그대 위해 되고 싶어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너는 아니 이런 나의 마음을…”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허스키한 남자 가수의 노랫소리를 들을 때도 콧마루가 찡해온다. 내 아이의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며 심하게 야단을 쳐 놓고는 돌아앉아서 눈물을 흘린다. 어느 날 장애아들의 실상을 보여주는 TV 화면을 보면서 어찌나 수건을 적셨는지. 장애아 돕기 후원회의 전화번호를 누른 뒤에도 오랫동안 가슴이 저렸다.
눈물의 차원으로 그 사람의 성숙도를 측정 할 수 있다느니, 다 성장한 사람이 유치하게 눈물을 흘린다면 정서를 의심할 여지가 있다느니, 하는 말들로 인해 난 주눅이 들곤 했다.
사람은 성장해 갈수록 눈물이 말라간다고 한다. 고장 난 수도꼭지 같던 나도 차츰 눈물이 줄어가고 있다. 슬픈 영화를 보면서도 시나리오에 의해 꾸며진 이야기일 뿐이라고 냉정한 분석을 하면 눈물이 나지 않는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보다 나의 입장과 이익을 먼저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으로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 사라져 갔다. 순수가 사라진 마음에서는 눈물이 생성되지 않았다.
눈의 질환 중에 ‘안구 건조증’이란 것이 있다. 적당한 눈물이 늘 안구를 촉촉하게 해 주어야 눈이 편안하다. 그런데 누액 분비가 감소되면 눈이 뻑뻑해지고 불편을 느끼게 된다. 때론 각막에 흠집이 생기기도 하고 염증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외로움을 숨기고 냉정하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작은 충격에는 감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감정 건조증’이다.
지난 해 봄, E 선생은 합창단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울고 계셨다. 희수(喜壽)가 되신 선생님은 ‘연령에서 오는 눈물이다’, 라고 스스로 진단을 하셨다. 나이가 많아지면 다시 어린아이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눈물이 순수한 정서의 산물이라 할 때 E선생은 나이 따라 그만큼 순수해 지셨는지 모른다.
만해(萬海)는 “나는 눈물의 수정(水晶)이 아니면 이 세상에 보물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했다. 나도 아름다운 보석하나 잃지 말아야겠다.
ㅡ <한국문인, 2001년 4.5월호. 2001년을 대표하는 문제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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