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의 사상 / 임선희
꿈에서 나는 종종 바닷가에 서 있다. 아직 가 본 일이 없는 낯선 바닷가.
계절은 여름이 아니다. 태양은 기운이 없고 모래는 차갑다.
색색의 비치 파라솔도 해수욕복 차림도 보이지 않는다.
꿈 속의 바다는 언제나 적막하다. 황혼인지 미명인지 알 수 없는 몽롱한 빛깔로 가만히 멈춰 있다. 때로는 파도가 흰 이빨을 드러내고 수면을 물어 뜯는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도 찾는 것도 아닌데 나는 혼자서 막연히 서 있는 것이다. 물결에 밀려 온 해초가 발목에 엉켜 비키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런 꿈에서 깨어나는 것은 항용 새벽녘이다. 기온이 내려가서 어깨가 시리다. 그런데도 마음은 이상하게 달아 있음을 느낀다.
대체 이것은 지구상 어디쯤에 있는 바다일까. 다음엔 또 언제 같은 꿈을 꿀 것인가. 두려움과 아쉬움이 섞인 묘한 감정으로 꿈 속의 바다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육지에서 바라볼 때 바다는 풍경이지만, 바다 가운데로 나갔을 때 그것은 사상이다.'
누가 쓴 어떤 책이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다만 '바다는 사상이다.' 그 한 마디를 잊지 못했다. 해양 중심으로 나가봤으면 하는 소원을 오랫동안 간직해 왔다. 그러다가 '92년에 처음으로 작은 기회를 얻었다.
뉴욕항에서 출발하여 바하마까지 왕복 일주일을 대서양 위에 떠 있었다. 이듬 해에는 밴쿠버에서 북상하는 태평양을 사흘간 항해했다. 대서양도 태평양도 내게는 비슷한 인상으로 비쳤다. 온 몸을 뚫고 들어오는 황금의 햇살. 숨 막히도록 밝고 파란 하늘과 바닷물, 바람, 구름, 선상을 오가는 서양인의 활달한 웃음소리......
저만치 해안선을 따라 언덕 위에는, 한 번만 살아보고 싶은 집들이 예쁘게 늘어서 있다. 하양, 연초록, 레몬옐로우, 환타, 베이지, 생일 케이크를 박아 놓은 듯한 국제 휴양지의 경관이 흘러서 간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감미롭고 화사하다.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그러나 그저 그것뿐, 바다 복판에서 사상 같은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사상이 싹트기에는 지나치게 강렬하고 지나치게 풍요로웠다.
극도의 감동과 극도의 무감동이 엇갈리면서 이유 없이 여객선의 계단을 오르내리고, 갑판을 서성이곤 했다. 나중에는 가눌 길 없는 피로에 눌려, 거의 표류하는 기분으로 누워 있었다. 결국, 내가 끊임없이 동경했던 것은 바다가 아니라 바닷가였음을 그때 알았다.
동해의 해변에 서는 것을 나는 무진장 좋아한다. 동해라고 해도 어디서 어디까지를 가리키는 것인지 정확히는 모른다. 지도를 펴면, 부산에서부터 한반도의 허리와 등을 감싸고 쭉 올라가 원산만을 거쳐 러시아 국경을 넘는다. 다시 나호드카니 블라디보스토크니를 지나 무슨 해협인가로 빠진다.
그렇게 먼 동해와는 인연이 없다. 강릉과 주문진, 속초의 앞바다, 특히 낙산사의 의상대에서 바라보는 바다가 나의 동해이다. 동해는 쓸쓸하다. 그래서 아름답다. 꽃이 피어나는 봄철에도 잎새가 무성한 7, 8월에도 파도소리는 외롭고 물빛은 어둡다. 눈 내리는 겨울 아침, 동해를 바라보고 있으면 지나온 날의 죄업을 모조리 고백하고 용서를 빌고 싶도록 서글프다. 그 적료감이 한정없이 나를 사로잡는다.
내가 꿈에서 자주 서는 황량한 바닷가는 바로 이곳이 아니었을까. 망막과 가슴에 새겨진 동해의 영상이 꿈에서는 그런 식으로 나타나는 것만 같다. 어쩌면 아득한 과거,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세계에서 그런 바닷가에 서 있었는지 모른다.혹은 앞으로 찾아갈 사후의 세상을 미리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바닷가에 서면 종교가 없는 나도 일시 신앙인이 된다. 영원과 영혼을 믿으려는 심정이 솟는 것이다. 이승에 살면서 저승 사람과 교감하고 대화했던 원시의 샤머니즘에도 소박하게 공감한다.
언젠가 나는 낙산의 홍련암굴을 등지고 서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음성을 들었다.
"선희야" 하고 부르던 40여 년 전의 그 음성을.
죽음이 무서워서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심리학자는 말한다. 반드시 옳은 해석은 아니다. 나는 아무런 공포심 없이 수시로 죽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37살까지 독신을 고집하던 큰아들이 작년에 결혼했다. 머지않아 애 아버지가 된다. 눈 감으려야 감을 수 없다는 핑계도 사라진 이제, 내게 있어 죽음은 일상의 평안한 주제로 떠올랐다. 울면서 성묘를 하던 시절도 옛날이 되었다. 지금은 혈연이든 타인이든 비석에 적힌 이름을 읽을 때마다 깊은 안도의 숨을 쉰다. 거기서 참으로 평화를 본다.
'x x 여기 잠들다.' 하는 묘비명보다 더한 찬사는 없다. 무덤보다 더 큰 위엄은 없다. 저들은 주어진 인생을 끝까지 살아내면서 각자의 책임을 이행했다. 그리하여 인류 중에서 가장 고귀했던 사람이 앞서 밟은 길을 좇아 간 것이다. 죽은 자는 산자를 향해 이야기한다. 죽음이 삶만큼 냉혹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농익은 열매는 떨어지면서도 자기를 탄생시킨 대지를 찬미하고, 자기를 키워낸 나무에게 감사한다. 나도 최후의 순간을 맞으려 한다.
조물주는 각 개인에게 항상 제일 좋은 것을 보내온다. 죽음 또한 조물주가 그것을 보내는 그 시기에 있어서 최상의 것이다.
이런 사상을 굳혀준 것이 동해의 바닷가였다. 그곳에 다녀온 지 2년, 해변에 서지 않아도 될 만큼 요즘은 마음이 고요하다.
-------------------------
임선희 수필가 프로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영문학과 졸업
수필가, 번역문학가, 방송작가
1975년부터 문필생활
방송 통폐합 이전의 동아방송국을 거쳐 KBS에서 20년간 구성작가로 활약 문예지, 일간지, 시사주간지 등에 다년간 컬럼 연재 1982년 이래 동아문화센터에서 수필 지도
저서
에세이집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외 14권
번 역 집 슈만과 클라라외 12권
신사임당 작품 감상
申師任堂 : 1504 ~ 1551.
이름은 인선. 호는 사임당, 임사재.어진 어머니이자,
현명한 아내이며 뛰어난 여류 화가..
가지와 방아개비
수박과들쥐
어숭이와 개구리
산차조기와 사마귀
맨드라미와 쇠똥벌레
원추리와 개구리
양귀비와 도마뱀
오이와 개구리
|
|
|
Home 자작 수필을 올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