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 칠
홍미숙
오늘도 덧칠을 한다.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덧칠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얼굴에 분칠을 하듯 내 인생에 대고 덧칠을 한다. 하지만 그 덧칠이 분칠이 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덧칠이 분칠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뭐가 부족한지를 우선 알아야한다. 넘치는 데다 계속 덧칠을 해봐라! 떡칠이 되고 말 것이다. 무엇이 부족한지 부족한 데가 어디인지 찾아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
“반 고흐에서 피카소까지” 미술전시회가 열리고 있어 그 전시장을 찾았다. 그림을 그릴 줄 모르면서 그림 구경하는 것은 좋아한다. 감상하는 법도 모르지만 명화 앞에 서면 가슴이 쿵쿵거리고, 눈물이 흐를 때도 있다.
이번에 전시되고 있는 작품들은 미국의 오하이오 주의 클리블랜드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4만여 점의 작품 중 94점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형성된 서양 미술의 흐름을 보여주는 유럽의 미술과 조각 작품들로 구성되어 전시되고 있다. 그래도 눈에 익은 작품들이 있어 아주 낯설지는 않았다.
르누아르의 ‘로맨라코 양의 초상’, 반 고흐의 ‘생 레미의 포플러’, 모네의 ‘빨간 스카프를 두른 모네 부인’, 고갱의 ‘파도 속에서’의 작품 앞에서는 감동이 더했다. 그밖에 로댕의 조각 작품인 ‘생각하는 사람’을 비롯하여 마네, 세잔느, 피카소, 마티스 등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전시된 작품 하나하나에 눈 맞춤을 빼놓지 않고 했다. 그러느라 관람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을 화가들과 조각가들을 생각 하는데도 시간을 많이 할애했다. 작품다운 작품 하나를 남긴다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님을 어느 정도 알기 때문이었다.
입체파의 거장 피카소 작품은 명암만 느낄 수 있었을 뿐 작품을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덕분에 상상력은 많이 키워졌다. 여러 작품 중에 후기 인상주의 화가인 반 고흐의 (1853~1890) 작품 앞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해바라기’로 유명한 그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입원했던 생 레미에 있는 정신 병원에서 그린 ‘생 레미의 포플러’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큰 플라타너스 나무’ 도 한참을 감상했다. 이 작품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그렸다. 최후의 습작이라는데 매우 걸작이었다. 누구라도 이 작품을 보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나무의 느낌에 압도당하고 말 것이다. 캔버스가 없어서 다이아몬드 무늬가 있는 이불 조각에 그림을 그려 남긴 작품이다. 큰 나무들이 용트림을 하듯 위용이 있어 반 고흐의 예술혼이 그대로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반 고흐는 고갱과의 갈등 후 자신의 한 쪽 귀를 잘랐다. 예술가의 기질이 발동했다고 보기에는 좀 마음이 아프다. 그 후 반 고흐는 사람들에게는 배신을 당한 적이 많으나 나무들에게는 배신을 당한 적이 한 번도 없다면서 “이 땅에 주인은 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나는 그의 말에 가슴이 찡했고 공감이 갔다. 그래선지 반 고흐는 말년에 들면서 자연 속에 있는 나무들을 주로 그렸다.
반 고흐의 작품 중에 ‘해바라기’를 제일 좋아한다. 그런데 이번 전시장에서는 ‘생 레미의 포플러’와 ‘큰 플라타너스 나무’에게 관심이 자꾸 갔다. 유난히 덧칠이 많이 된 두 작품을 감상하면서 그의 힘들었던 삶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 그림들을 그리면서 본인의 인생에도 덧칠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반 고흐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내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주위에 보면 “수채화처럼 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 얼마나 맑고 깨끗한 삶인가?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한 번 쯤은 해 보았을 것이다. 수채화 같은 인생! 그렇지만 나는 도저히 그런 삶을 살아갈 자신이 없다. 뭐든 한 번에 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몇 십 번에 걸쳐 해야만 하나를 겨우 이룰 수 있다. 그러니 내 인생은 수채화하고는 거리가 멀다.
내 인생은 수채화보다 유화가 어울린다. 유화는 수채화와 달리 수없이 덧칠을 할 수 있다. 그림이 마음에 안 들면 그 그림 위에 덧칠을 하여 바꿀 수 있다. 밑그림과 아주 다른 그림을 그려낼 수도 있다. 그게 유화의 매력이다. 그런 유화가 내 인생과 맞다. 끊임없이 덧칠을 해대야하는 게 내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게 필요한 것은 수채화물감보다 유화물감이다.
내 인생의 밑그림은 내가 태어나면서 부모님이 그려주셨다. 그 위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덧칠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 동안 덧칠을 수도 없이 했다. 삶에 시행착오도 잘 일으키니 부모님이 그려주신 밑그림의 형태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것도 그려보았다가, 저것도 그려보느라 무수히 많은 덧칠을 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도화지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나는 도전하는 삶을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패도 많이 한다. 그러니 부모님이 그려주신 밑그림 위에 이것저것 덧칠이 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반 고흐의 그림을 보면 입체감이 선명히 드러난다. 다른 화가들의 그림보다 덧칠이 두껍게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내 인생의 화폭에도 반 고흐의 그림 못지않게 덧칠이 두껍게 칠해져있다. 내가 “수채화처럼 살고 싶다.”는 말을 안 하고 살아온 게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내 인생을 어느 정도 예측했었나보다.
화가들은 많은 작품을 남긴다. 화가가 아닌 나는 내 인생의 화폭에 한 작품만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도 제대로 못 그려내 절절매고 있다. 인생이란 화폭이 워낙 커서 그런지는 모르나 내 그림이 완성 되려면 아직도 멀었다. 덧칠만 하염없이 해대고 있다. 벌써 반세기 동안이나 덧칠을 해대며 살아왔다. 욕심 같아서는 명화를 남기고 싶은데 작품이 어설프기만 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덧칠을 하며 살아가야할지는 모르겠다. 그저 욕심을 잠재우고 그림을 그려나가는 수밖에 없다. 덧칠 두께가 두꺼워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만큼 삶의 흔적이 많아 그런 것으로 위안을 삼으련다.
누군가 내 인생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미소라도 띠었으면 좋겠다. 가슴이 쿵쿵거리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그런 작품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미소정도만 띨 수 있으면 대만족이다. 희망을 가지고 오늘도 내 인생의 도화지에 덧칠을 힘차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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