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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종 無聲鍾
吳 岐 煥
우리 집 장식장에는 여러 개의 종이 있다. 인사동을 지날 때나 국내외 여행을 할 때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게 된다. 종을 구하기 위해서다. 마음에 들어오는 종이 있으면 들고 온다. 나를 잘 아는 지인이 해외여행을 다녀올 때면 종을 선물하기도 한다. 이렇게 하나 둘 모여든 것이 삼십 여개나 된다.
가끔 장식장 문을 열고 종을 꺼내 만져도 보고 흔들어도 본다. 워낭소리, 학교종소리, 교회종소리, 깊은 산사에서 울리는 범종소리, 풍경소리, 건널목 차단기에서 나는 종소리, 요령소리... 소리가 제 각각이다. 삼십 여개의 종은 각기 제 소리를 내고 그 소리는 서로 다른 의미가 되어 가슴에 들어온다. 그러니까 흔들다가 제자리에 놓으면 조용하지만 속으로는 소리 없는 저만의 소리를 품고 있는 것이다.
수레에 짐을 가득 싣고 가는 소의 턱밑에서는 워낭소리가 난다. 그 소리를 좇아 하얀 먼지가 이는 신작로를 간다. 그래도 성이 차지 않는지 마부는 채찍을 휘두르고 그럴 때마다 워낭소리는 더 다급해진다. 밤눈이 어두운 말도 턱 밑에 달린 워낭소리를 좇아 밤길을 간다. 이렇듯 워낭소리는 자기의 소재를 확인 시키는 소리였다.
종- 초등학교 교무실 창 밖에 달려있던 놋쇠로 만든 종소리 따라 교실 문이 열리고 닫히곤 했다. 해 그림자 좇아 하루를 지내던 나한테 학교종소리는 교장실에 있는 괘종시계보다 더 정확한 시계였다. 하학종소리가 울리면 어김없이 기적소리도 들려왔다. 검은 연기를 뿜으며 통근열차가 지나갔다. 시간을 알리는 학교 종소리는 괘종시계였다.
6ㆍ25전쟁이 끝나고 이십여 년전 까지만 해도 밤에도 새벽에도 교회에서는 종이 울렸다. 종소리는 시간을 알려주고 신도들은 종소리 따라 모이고 헤어졌다. 새벽종이 울리면 나도 일어나 새벽을 나섰다. 신문을 배달하러. 어쩌다가 종소리를 못 듣고 눈을 떠보면 창문이 환해있었다. “어머니, 왜 안 깨웠어?” 하면 “흔들어도 눈을 못 뜨기에...” 하면서 말끝을 흐리는 어머니한테 투정을 하면서 허둥대던 나. 교회종소리 속에는 신문배달 소년의 달음박질소리도 묻어 있었다.
종- 도심을 가로지르는 철길 옆에 있던 차단기는 기적이 울리면 숨 가쁘게 울어대는 종소리 따라 내려오고 올라가기도 했다. 이럴 때면 달리던 자동차도 사람도 일단 멈춤. 건널목의 종소리는 경고의 소리였다.
또한 산사에서 울리는 범종소리는 예불시간이나 식사시간을 알리기도 하지만 중생의 마음을 움직여 깨우치게도 한다. 왼 산에 가득 번지는 범종소리를 들으면 달리던 짐승도 걸음을 멈추고 속세에 찌든 이도 두 손을 모아 하나 되게 한다.
그뿐인가, 시골집이나 산사의 처마 끝에 달려있는 풍경, 몸을 허공에 의탁한 풍경은 바람결 따라 흔들리며 맑고 청아한 소리를 낸다. 바람, 자신은 울지 않지만 남의 가슴을 울려 소리 내어 울게 한다. 이 세상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바람을 맞으면 소리를 낸다. 자신은 흔들리면서도 흔들리는 마음은 붙잡아주고 기우뚱거리는 몸의 중심이 되어준다. 풀벌레마저 잠든 삼경에도 뎅그렁 뎅그렁 소리를 내는가하면 서있는 듯싶지만 서있는 그 자체도 소리되어 마음에 들어와 파문을 일군다.
종- 요령잡이가 흔드는 요령소리에 발을 맞추며 부르는 구슬픈 사설은 억장을 무너트리게 한다. 내 나이 열세살적. 아버지가 누어있는 상여를 좇아 논두렁밭두렁을 지나 앞산을 오를 때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고 설워마라 /명년 춘삼월 돌아오면 /너는 다시 피련마는 /다시 올 줄 모르더라! 가지 마오! /불쌍한 어린자식 두고 가지 마오! 가지를 마오!’ 요령잡이의 구슬픈 사설을 들은 지 육십년이 다 돼간다. 나는 그때 아버지보다 더 늙은이가 되었건만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산다. 요령소리는 건널 수 없는 강물이 되어 흐르고 있다. 이렇듯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종이 있는가하면 들을 수 없는 종도 있다.
종- 매월당 김시습과 추강 남효온의 우정은 돈독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한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평생을 세상과의 불화를 택한 김시습. 그보다 19세 아래지만 단종 생모의 복원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려 벼슬길이 막혀버려 술에 취해 살다가 38세 로 생을 마감한 남효온. 그들의 우정에는 종이에 그린 종을 뜻하는 무성종이 등장한다.
매월당이 추강에게 현 없는 거문고를 뜻하는 무현금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낸다. 멀쩡한 거문고 줄을 떼어 보내는 것은 우스운 일 그렇다고 말수도 없는 일. 생각 끝에 종이에 종을 그려서 보낸다. 무성종을. 무현금은 마음을 통해 그 연주를 들어야 하고, 무성종도 마음의 울림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것. 외로운 영혼의 부딪힘으로 이렇듯 맑으면서 애절한 파장을 빚어낸 우정어린 편지가 어디 또 있을까싶다.
무성종. 그렇다. 소리를 낼 수 없는 종, 그 종이야 말로 소리를 낼 수 있는 그 어떤 종보다도 더 크고 더 깊은 뜻을 담아 울리는 묵시의 종, 암유의 종이기도 하다.
원컨대 나도 소리를 안으로 머금고 파도처럼 일렁이는 무현금과 같은 글을, 아니 무성종과 같은 글 한 편을 썼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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