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 달린 마리아 상
윤연모
내 머리 속에 간직한 유럽에 다시 한 번 가고 싶어 그 기억을 되살려본다. 처음에 유럽 땅을 밟은 곳이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이다. 독일 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치마 밑으로 꼬리를 내밀고 있는 황금 관을 쓴 마리아 상이다.
우리들의 차는 하이델베르크로 가는 아우토반을 달리는데 나무가 도로 양쪽에 우거져 있어 그 음영 때문에 새까맣게 보이는 것이 인상적이다. 과연 독일을 ‘흑림(黑林)의 나라’라고 부를 만하다. 소나무와 자작나무와 잡목이 우거져 있다. 계속 되는 평야지대에 가끔 보이는 농촌 풍경이 아름답다. 어느 집이나 빨간 지붕에 흰 벽을 가진 모형 같은 집이 모여 동네를 이루고 있다.
드디어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하여 성으로 올라가는데, 낙뢰를 맞아 참담하게 깨어진 성벽을 보수하지 않은 모습 그대로 우리에게 선을 보인다. ‘사랑의 문’은 루드비히 왕이 이웃나라 영국에서 시집온 엘리자베스 공주를 위하여 몰래 만든 것이다. 그녀의 16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것으로 하루 만에 지었다고 한다. 사랑하는 공주 이름을 따서 ‘엘리자베스 문’이라고도 한다. 하루 밤 사이에 생긴 그 문 앞에서 기뻐하는 엘리자베스 왕녀를 상상해 보았다. 여인들은 자신이 그녀인양, 남성들은 자신이 루드비히 왕인 것처럼 서로에게 사랑을 다짐하며 사진을 찍었다.
독일 왕이 살았다는 하인리히관은 르네상스 이후에 만들어진 궁전이다. 궁전 전면 여기저기에 역대 왕 모습을 새겨놓았다. 특히 재미있었던 것은, 입구의 문에 있던 두 명의 왕의 두 다리 사이에 커다란 수류탄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서 모두 킥킥 웃었다. 그런데 그것은 왕의 그것을 희화한 것이 아니고 전쟁에 나갔을 때의 보호구라고 한다.
그 성 바닥은 붉은 사암으로 되어 있는데 진흙 바닥도 아닌 그곳에 발자국이 푹 패어 있다. 마치 시멘트로 바닥을 입혀서 마르기 전에 누군가 발자국을 일부러 만들어 놓은 듯이 사실적이다. 하지만 바닥이 사암이니까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하인리히 왕이 왕비가 외간 남자와 바람피우는 것을 의심하여, 사냥 나갔다가 다른 때보다 일찍 성에 돌아왔단다. 당황한 나머지 왕비가 침실에서 뛰어내리다 한 발은 궁의 앞마당에 또 한 발은 그 궁 앞을 흐르는 넥카 강물에 떨어지는 바람에 발자국이 하나 밖에 없다고 한다. 나는 그 왕녀의 신체 사이즈를 가늠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한쪽 신발을 벗고 발을 거기에 맞추어 보았는데 거의 비슷하다. 아마도 실제 존재한 사람이었다면 나 정도의 체구를 가진, 약간 키가 큰 여자였을 것 같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한쪽 발은 넥카 강에 뻗을 수가 없다. 혹시 그녀가 초능력을 가졌던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엄청나게 큰 와인 저장고가 눈길을 끌었다. 유럽에서는 석회가 많아서 산에는 눈 쌓인 듯이 흰 부분이 많고 물에는 석회 성분이 많다. 포도주를 마시면 몸속에 쌓인 석회를 몸 밖으로 배출해주기 때문에 포도주가 유럽인의 건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그 향긋한 포도주 향기 때문에 궁 안에서 술 저장고를 지키는 창고지기는 참으로 힘들었을 것 같다.
하이델베르크 성 다리 아래로 넥카 강이 유유히 흐른다. 그 다리 오른쪽으로 ‘철학자의 길’이 있다. 그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 칸트가 산책하던 길이다. 칸트는 항상 일정한 시각에 그 곳을 산책하기 때문에 칸트가 어디에 나타나면 몇 시고, 또 어디에 나타나면 몇 시 몇 분이라는 이야기는 유명하지 않은가. 나는 그 다리를 건너서 그 옛날 칸트 할아버지의 숨소리라도 맡아보고 싶었지만, 여행을 주관하는 신은 나에게 그런 멋진 시간을 주지 않았다.
성 아래로 내려와서 우리는 시청과 성당이 공존하는 광장으로 향하였다. 중세 시대에 신과 인간은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그래서 중세유럽에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성당 문화가 발달하였다. 또한 바로 신학을 공부할 수 없고 다른 학문을 공부한 사람에게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고 한다. 어디를 가나 성당이 있고 그 맞은편이나 가까운 곳에 시청이 있으며 그 시청 앞 광장에서 토론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자연스럽게 시장이 생겼다. 이곳 하이델베르크에도 13세기에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대성당이 있다. 하지만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어 다시 재건하였다. 그리고 그 오른쪽으로 18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멋진 시청이 있다.
그 옆 광장에 금관을 쓴 마리아 상이 땡볕을 받으며 눈부신 모습으로 서 있다. 독일은 1618년 종교전쟁에서 신교와 구교의 싸움으로 사회가 피폐해지고 그 무렵에 유럽에 페스트가 번져서 중세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 정도가 죽었다. 또한 인간보다 종교가 세상을 지배하였기 때문에 세상은 말 그대로 암흑 시대였다. 시청 앞 광장 뒤편에 있는 마리아상은, 마리아가 페스트를 누르는 꿈을 꾼 덕분에 페스트가 나았다고 해서 마리아상 머리 위에 황금 관을 씌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뒷면에서 본 마리아상은 흉악하게도 치마 밑으로 꼬리를 달고 있다. 숨겨진 이 꼬리는 황금관이 상징하는, 페스트를 퇴치한 종교의 힘보다 곡물을 팔아 몰래 면죄부를 사던 종교의 해악을 상징하는 듯하다. 과연 철학이 발달한 독일인 조상답게 마리아 상도 철학적으로 꼬리를 달아서 세워놓았다.
하이델베르크에서 뮌헨 쪽으로 가는데 줄기가 하얀 자작나무와 키가 큰 삼나무 그리고 황금빛 밀밭으로 이어지는 드넓은 평원이 참으로 아름답다. 그런데 눈에 띄는 알파벳 두 자가 있다. 유럽에 화장실이 하도 귀하다 보니, 화장실이 있으면 라고 휴게소를 알리는 간판에 써 있다. 유럽은 자연이 파괴되는 것을 꺼린다는 이유로 화장실을 새로 만들지 않는다. 게다가 화장실 입장료로 보통 50센트를 받는데 유로 1달러가 1400원이니 화장실 입장료가 약 700원인 셈이다. 항상 공짜라고 생각하던 것에 돈을 지불하게 되니, 잠시 어처구니없었다. 하지만 그곳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즐거움과 오염 행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니, 어찌 생각하면 입장료를 내는 것이 더욱 당연한 듯하다.
인생이란 어쩌면 여행과 같은 것이다. 시간에 쫒기며 사는 일상에서 자기 스스로 바쁜 스케줄을 잡고 거기에 스스로 묶인다. 우리는 운전기사가 끌고 가는 버스를 타고 그 버스의 한 자리를 잡고 고단한 가운데 머리 무게를 느끼며 졸고 또 존다. 버스 안에서 청량제와 같은 독일 가곡이 흐른다. 고등학교 시절에 대머리 독일어 선생님에게 배웠던 가곡, ‘당신을 사랑해요[잇히 리베 디히]’와 ‘보리수’를 빼고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고상하며 마음을 예쁘게 정화해 주는, 정성을 다하는 성악가의 미성에 마음을 빼앗겼다. 자신도 모르게 음악에 빠지며 과거에 휘황찬란한 문화를 가졌던 유럽에 대해서 사색하고 정작 중요한 자기 인생은 잠시 미루어두어도 되니, 이 여행은 분명 나에게 편안한 휴식처이다.
* sysop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10-08 12:20) |
|
Home 자작 수필을 올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