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아래 불빛을 보라! / 정영숙
몇 년 전 늦가을 아침. 우리 교회 찬양대 지휘자 부부로부터 창녕에 있는 화왕산을 가겠느냐고 전화가 걸려왔다. 오후에 비가 올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들어서 좀 망설이다가 순간적으로 화황산의 억새풀이 보고 싶어 평상시에 입고 다니던 옷차림을 하고 신바람 나게 그분들을 따라 나섰다.
화왕산은 756m의 그렇게 높지 않은 산이다. 하지만 등산에 미숙한 나로서는 꽤 힘든 산행이다. 나는 산에서 주은 나무 지팡이를 짚고 올라가며 대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능력에 탄성과 감사를 했다. 지휘자 부부는 먼저 올라가고, 나와 처음만난 이혜숙님과 천천히 호흡을 맞추어 가며 담소하는 사이에 산마루에 닿았다. 넓다란 분지에 온통 억새풀이 뒤덮혀 있었다.
우리들은 바람에 무리지어 하늘거리는 억새풀에 감탄을 하며 사진촬영을 한 후, 그곳에서 파는 오뎅을 사서 먹으면서 두 서너 시간 아주 즐겁게 놀았다.
산에는 어둠이 빨리 오니까 내려가자고 독촉하는 지휘자님께 먼저 내려가서 차를 옥천 쪽으로 가져오게 하고, 우리 셋은 올라온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철을 잊어버리고 피어있는 노란 개나리와 빨간 열매에 반하여 손뼉을 치고 노래를 부르다가 시간의 흐름을 깡그리 잊어버렸다.
오후 5시쯤. 산길을 내려가는데 자그마한 산장이 보여 그곳에 들어가 커피 한잔씩을 사서 먹었다. 도심 속의 찻집에서 마시는 기분보다 산속에서 마시는 커피가 더 향기가 좋았다. 솔잎 같은 상긋함과 아카시아 꽃같이 달콤한 맛이다. 셋은 커피 맛이 좋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오던 길을 되돌아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
이혜숙님이 시간이 급하다면서 둘러서 편하게 가는 길 보다 좀 가파르고 좁은 길이지만 빨리 갈 수 있는 지름길을 가자고 말을 하여, 마음이 급한지라 그렇게 하자고 한 후 걷기 시작을 했다. 이때 사방에는 어두움이 이슬처럼 깔리고 빗방울이 뚝! 뚜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무와 바위를 엮어놓은 줄을 잡고 한 발작 한 발작 옮기는 순간 어두어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발이 땅에 닿는 것인지 바위에 미끄러지는 것인지 도저히 감각이 없다. 하루가 천년 같다는 말과 같이 일분이 몇 시간 걸리는 것 같은 막막함에 식은땀이 났다. 얼마동안 내려가는데 엮인 줄마저 없어졌다. 바위만 있는 곳. 나무 한그루만 있는 곳. 미끌미끌한 흙만 있는 곳. 비는 후들후들 나무를 흔들어대며 오고 있다.
그래도 이혜숙님과 이경자님은 산길에 익숙하여 나보다는 내려가는 행동이 빠르다. 나는 도무지 서서는 못 갈 것 같아 뒤로 누어서 발을 뻗치다 오그리다 벼라 별 동작을 했다. 쪼삣한 돌이 신발을 뚫고 들어와 구멍이 났는지 발이 아프고 발가락이 뭉개졌다. 캄캄한 것이 아니라 깜깜한 산에서 119에 연락을 하려고 핸드폰을 두드려도 되지 않았다.
한참 간 것 같기도 하고 그 자리에 있는 것 같기도 한 알 수 없는 순간이다. 이제는 지쳐서 발마저 움직여 주지 않는다. 생각의 혼란이 왔다. 이렇게 막연히 뒤로 누워 내려가느니 차라리 나무 밑에서 자고 갈까? 아니야, 지금도 추운데 한밤중에는 더 추워서 정말 죽을 줄 모르니 그래도 기여서라도 내려가야지. 만약 내일까지 살아서 못 간다면 실종자 정00외 2명을 찾는 방송으로 마산이 시끄러울 것이니 이 얼마나 창피하겠느냐는 등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실종자 찾는 가족들의 방송을 듣고 마음만 안타깝게 느꼈지 체험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절망과 비통을 몰랐는데 아! 이것이 실종이구나! 하고 절실히 깨달았다. 먼저 내려가던 이혜숙님이 나의 이름을 부르며 다시 올라오고 있다. 보통 체중도 아닌 나를 붙들고 엎어지고 미끄러지는 이경자님의 고생을 어디에다 비할꼬!
몇시쯤 어디쯤 되었는지 모른다. 앉아서 조금 조금씩 발을 옮기다 그냥 주저앉았다. 그리고 내려가기를 포기했다. 차라리 마음이 편안하다.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으니 지금 이대로 죽는다 해도 미련가질 것도 없는 세상이지만, 이 이상 불안과 고통 없이 조용히 눈감으면 행복이고 감사할 뿐이다. 작은 일에는 동동 하지만 막상 큰 일이 닥치면 침착해지고 빨리 포기를 해버리는 장점인지 단점인지 모를 내 성격이 그날도 나타났다.
산처럼 정직하고 능통성 없는 물체를 전여 두려워하지 않고 공원을 산책하는 차림으로 따라 나선 무지한 나. 꽃에 취하여, 바람에 흔들려, 기분 낼대로 다 내다가 해 떨어진 산길에서 비를 맞으며 무서움에 떨고 있는 나. 훈련과 준비 부족을 느끼면서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망연자실(茫然自失)한 진흙투성이가 된 나를 생각하니 어이가 없다. 그뿐인가 좀더 빨리 갈수 있는데 나 때문에 고생을 이중으로 하고 있는 두 분. 그리고 밑에서 애간장을 태우며 기다리고 있을 정찬진 선생님을 생각하니 미안하고 부끄러울 뿐이다.
인간이 얼마나 두마음을 가지고 사는지 나 자신도 놀랐다. 지금 죽는다 해도 후회가 없다고 각오했던 순간은 어디다 던져버리고,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 돌아가야 된다는 생의 욕망을 다시 붙들고 “ 하나님! 이제는 내 힘으로는 못 가겠습니다.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아버지시니 이 산에서 죽이든지 살리든지 맘대로 하이소! 그러나 살고 싶습니다” 라고 생떼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은 밑바닥까지 떨어진 내 마음을 아시고 구원자의 음성을 들려주셨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정신을 차리고 귀를 기우리니 저 아래서 “이경자! 이경자! 어디있어? 소리 질러봐!” 라고 계속 아내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정찬진선생님의 음성이 들렸다. 아!? 이제는 살았구나. 하는 기쁨에 셋이서 동시에 “ 여기요. 여기.” “ 여기가 어디요? ” “ 어딘지 모르지만 작은 소나무가 몇 그루 나란히 서있는 곳이요 ” “ 그르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어. 내가 올라 갈테니까 ” 서로 소리소리 지르며 신호를 했다. 이때 우리 셋의 모습은 마치 목장을 떠난 양이 방황하다가 주인의 음성을 듣고 기뻐 뛰어가는 것과 같은 심정이다.
그 길에 익숙한 정선생님이 올라왔다. 화가 난 모습인데 이혜숙님과 나를 의식하고 참는 것 같은 말투로 “ 지금부터는 아무 생각 말고 내 팔을 꼭 붙들고 나무 옆으로 한 발짝씩 떼어야 합니다. 저~아래 불빛을 보고 무서워 말고 걸어야 됩니다. 이제 다 와 갑니다. ” 라고 안심을 시키며 우리들을 인도했다.
저 아래 불빛을 보고 걸어라 하는데 내 눈에는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대도 불빛을 볼 수 있다는 희망에 발걸음은 날아갈 것 같다. 다 내려왔다. 안도의 숨을 쉬고 불빛아래 앉으니 감격스러웠다. 찢어지고 흙투성이 된 내 옷을 보니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나왔다.
어둠을 헤매다 보니까 빛의 존재를 더 알았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실 때 왜 빛을 첫 번째로 했는지 그 뜻을 새삼 깨달았다. 우리의 삶에 누구를 잘. 잘못 만나느냐에 따라서 성공의 측도가 달라지는 것과 같이 그날 세분은 산에 무지한 나를 데려오고 또 만남으로 인하여 고생을 많이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분들을 만남으로 인생을 돌이켜 볼 수 있는 경험을 쌓았다.
인생은 산행이다. 태어나고 죽는 것도, 성공도 실패도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 신의 영력이다. 다만 사람마다 자기의 체질과 능력 따라 최선을 다하여 산을 오를 뿐이다. 높게 올라가면 갈수록 더 깊게 떨어지고, 낮으면 낮을수록 얕게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신의 지렛대며,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절망의 땅바닥에서도 다시 올라갈 수 있는 불씨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예전처럼 신을 원망하거나 불평을 하지 않고 천천히, 담담히,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돌아와 노래시 한편을 써서 작곡자 두 분에게 보냈는데 똑 같은 시를 가지고 한마디의 선율도 같은 것이 없다. 우리 인생도 그와 같이 각각 다르기에 그날 쓴 노래의 가사를 써 본다.
인생길
정영숙작사
정인상. 이설호작곡
1. 인생길 험악하여 걸어오기 어려웠네
이산저산 넘어올 때 돌 뿌리에 차이며
구비구비 거센 파도 내게로 달려들 때
어찌할바 모르고 두려움에 떨었네
아-아 그러나 우리 주 나의 주님
굵은 지팡이 기둥 되시어 넘어질 때 붙드시며
눈앞이 캄캄할 때 등대되어 주셨네
2. 인생길 너무 몰라 내 힘으로 살려했네
위에계신 내주예수 의지하지 않고서
세상 것만 의지하고 헛된 것 바라보며
주를 원망하면서 내 힘으로 살려했네
아-아 그러나 우리 주 나의주님
못된 내 행실 꺽 어 주시려
내게 시험주시며 오늘도 주님의 뜻
깨달게 하시었네
사랑의 하나님 남은 길 이끄소서
★이 글은 미국 주정부와 에피포토(epipoto) 문학사 주최의 수상작품입니다
검색깨달음
검색당선
|
|
Home 자작 수필을 올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