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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라 길 잃을만큼 멀리..... / 서영은
가을이 되면 세상의 모든 길들은 풍부한 표정으로 바뀐다. 산속 깊이 저홀로 생겨 저홀로 깊어지는 길은 말할 것도 없고, 늘 차를 타고 바쁘게 지나다니는 출퇴근 길도 노랗게 변하다가, 어느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들 사이로 낙엽을 수북이 덮어쓰고 있다. 바람에 편편이 날리던 낙엽 하나가 달리고 있는 차창에 우표처럼 들러붙으며, ‘떠나라, 길을 잃을 만큼 멀리 떠나라’고 권유하는 것 같다.
언제부턴가 여행을 떠나게 될 때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경우를 염두에 두게 된다. 두려움 앞에서 되돌아서는 그런 여행이 아니라, 두려움을 어떡하든 지나서 더 멀리 가보는 여행을 꿈꾸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 나라의 유명한 명승지나 볼거리를 찾아 다니기보다는, 그 고장 전체에 실핏줄처럼 뻗어있는 이런저런 길을 따라 그저 걷고 또 걷는 것을 재미로 여기게 된다. 보행하는 여행자에게 낫처럼 휘어져 있는 고즈넉한 길보다 더 매혹적인 것이 있을까.
그라나다의 알바이신이란 마을의 미로처럼 얽혀 있는 하얀 소로들, 노르웨이 베르겐의 바이킹 시대 목조가옥들, 그 사이의 삐걱거리는 널빤지 골목, 셰익스피어의 고향 스트렛포드 어펀 에이번의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는 주택가 골목, 카프카의 생가가 있는 프라하의 황금소로, 포르투갈 신트라의 페나 궁전으로 가는 숲속길….
한번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길들은 이끼 낀 얼굴로 우리를 손짓한다. 하얀 커튼이 드리워진, 침묵하는 조그만 창들을 감싸고 있는 낡은 벽들 사이로, 깊숙이 휘어진 이끼 낀 소로는 신비로움과 동시에 두려움을 자아낸다.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기도 하려니와, 되돌아나오는 길을 모를 만큼 빠져들까 봐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길은 항상 죽음에 이를 만큼 매혹당해 보고 싶다는, 새로움에 대한 갈망을 부추긴다. 뒤에 남겨두고 온 것들을 잃는 것이 두려운가. 안주해온 지붕 밑을 떠나기가 두려운가. 망설이다 되돌아설 때마다 미지의 장막 뒤로 영원히 숨어버리는 세상의 길, 길들.
지난 10월 24일부터 두 주 남짓 영국과 포르투갈을 떠돌아다녔다. 특히 포르투갈은 지인 하나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이방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호텔을 빠져나와,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채, 길을 따라 그저 걷고 또 걷는 나날들이었다. 배가 고프면 길에서 파는 군밤을 사서 광장의 벤치에 앉아 끼니를 때웠다.
돌아오기 전날엔 배를 타고 세이샬이란 지역으로 갔다. 서너 시간 남짓 길에 취해 돌아 다니다 선착장으로 돌아갈 참에 길을 잃고 말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바다가 가까이 있다는 기미는 어디에도 없었다. 갓 지은 5층짜리 아파트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빨간 사과와 양상추를 파는 구멍가게 안에서 앳된 소녀가 비닐봉지를 들고 나와서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골목으로 사라졌다. 서울의 동네 풍경이나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서울에서 열 시간 비행기를 타고 런던으로 와서, 다시 비행기로 두 시간 날아온 곳에서, 또 다시 반 시간 남짓 배를 타고 온 유럽대륙의 최남단이었다. 그곳에서 길을 잃었음에도 내 안에 두려움 대신 넉넉한 평화가 있었다. 집이란 곳은 내가 정녕 돌아가야 할 곳이 아니었다. 집은 더 큰 세계로부터 나를 감금하고 있었던 자기도식일 뿐이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는 말씀과 같이, 내가 사는 것은 내 힘으로써가 아니라, 기르시는 분이 따로 있음을 알게 된 까닭이다.
( 소설가 )
* sysop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1-08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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