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小珍 박 기 옥
2월이 유난히 짧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일은 아닐 터이다. 우리네 인생이 얼마나 복잡다단한지는 달력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유명인사도 아니고 연예인도 아니며, 일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은 더욱 아니건만 달력 메모 칸이 빌 때가 좀체 없다.
94세의 시어머니는 입원해 계시는데 84세의 친정아버지는 생신을 맞으신다. 조카는 혼인 날짜를 잡았고, 질녀의 아가는 첫돌을 맞는다고 한다. 10년 만에 소식을 전한 친구가 암 투병 중이라 하여 병원으로 달려갔는데 느닷없이 친정 동생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같은 장소에서 맞이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오전에 초상집에 갔다가 오후에는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결혼식에 참석한 날도 있었다. 슬퍼할 일과 축하할 일이 씨줄날줄로 얽히는데다 그저께는 친정조카의 군 입대를 명분삼아 가족 여행으로 남해까지 다녀왔다. 바다도 좋고 전복죽도 맛있었지만 겹친 일정으로 피곤했던지 돌아와서는 소파에서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낮잠이 든 것이다.
얼마나 잤을까. 햇볕이 눈 부셔서 잠에서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밖은 바람이 부는지 행인들이 걸음을 재촉하는데 정남향의 거실에는 햇볕이 따스하다. 잠은 깼으되, 기지개만 켠 채로 소파에 한참 누워 있었다. 햇볕을, 나른함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재미삼아 나의 행복을 챙겨볼 때가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하찮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24시간 뜨겁게 샤워할 수 있는 집에 사는 것,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것, 언제라도 술 같이 마실 친구들이 있는 것 등인데, 햇볕 또한 그 속에 포함시켜야 하지 않을까.
문득 어떤 움직임이 느껴져 베란다로 눈을 돌렸다. 군자란이 한 송이 피어 올라오고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입 다문 봉오리였다. 바로 오늘, 그러니까 내가 소파에서 낮잠 든 사이 날개 짓을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후딱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를 내려 컵을 든 채로 배란다로 가서 화초들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화초라야 잡풀에 가까운 하찮은 것들이지만, 하루하루의 달라지는 모습을 나는 죄다 꿰고 있다.
아파트의 화초에게는 시간이 입력되어 있지 않은 것일까. 밤에만 꽃이 피는 야래향은 겨울을 알고 나뭇잎을 떨구기 시작했는데, 아이비나 스킨다부스는 기름이 돌면서 새 잎이 돋는다. 앙증맞은 강아지똥은 흙 쪽으로 몸을 바짝 기댄 채 줄기부터 말라 들어가고 있는데, 철 없는 영산홍은 의기양양하게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나는 잠깐 이 모든 생성과 소멸에 슬픔을 느꼈다. 무겁지 않은, 가볍고 달콤한 슬픔이다.
나는 문득 내가 잠깐 소파에서 낮잠 든 사이 지구상에서 일어났을 여러 가지의 움직임을 생각해 보았다.
이대통령은 여전히 경제회생을 장담하고 있고, 사르코지는 아프리카를 휘젓고 다니고 있었다. 탁신은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조국으로 돌아갔으며, 북한에서는 뉴욕필의 이벤트가 성사되었다.
시어머니는 나 없이도 점심을 달게 잡수셨고, 친정아버지는 제자를 만나 식사 대접을 받았다고 했다. 산부인과에서는 여전히 누군가가 태어났을 것이고, 영안실에서는 또 누군가의 장례가 치루어졌을 것이었다. 변함없이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었다. 지구상에서 나는 잊혀진 사람이었다.
라디오를 틀었다. 최유라와 조영남이 대담을 나누고 있었다. 아가씨가 살을 빼려고 의사를 찾아갔다. 야채와 과일을 많이 먹으라고 의사가 충고한다.
진료를 마쳤는데도 쭈뼛쭈뼛 돌아가지 않던 아가씨가 묻는다.
“야채와 과일은 식전에 먹나요, 식후에 먹나요?“
아가씨도 아닌 나는 한바탕 웃고, 사과를 잘 씻어 껍질째 먹기 시작한다.
깨끗한 집에서 단단한 사과를 먹으니 이 또한 나쁘지 않다.
T.V는 뭘 하나. YTN을 틀어 보았다.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이 팔을 들고 무언가를 열심히 외치고 있었다. 버락 오바마다. 나는 사과를 베어 문 채 넋을 잃고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세상에나!
지구 한 쪽에서 용암이 치솟고 있었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것이었다. 내가 잠 든 사이에.
- 청하문학 2009 -
http://blog.daum.net/gopark0405
|
Home 자작 수필을 올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