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봄
김순재
앞산이 파릿해졌다. 햇살 아장거리는 저수지 하얀 뚝방길이며, 포로소롬한 온갖 풀들이며, 가슴이 벅차다. 개나리 진달래 벚꽃은 가버렸어도 눈부신 봄날이다.
나는 호숫가 벤치에 앉아서 봄을 만끽한다. 바쁠 것도 없고 그다지 매일 것도 없어 자유 하다. 인생의 자잘한 테두리를 벗어나 하나의 큰 테두리 안으로 들어와 있다. 생(生)과사(死), 두 점을 사이에 놓고 그려진 큰 테두리가 인생이라면, 자식이란 테두리, 부부의 테두리. 부모의 테두리, 그 밖의 일상의 수없이 많은 테두리는 그 공간 안에 들어있는 작은 테두리라 할 수 있다. 그리 보면 지금 나는 많은 작은 테두리에서 벗어나 생과사의 큰 공간 안에 있다 할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허전도 하다. 그러나 한 개체로서 자유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워졌다. 그 시간 역시 큰 테두리 안에 금 그어진 한정(限定)이지만, 그래도 느긋하고 가볍고 좋다. 어쩌면 지금이 내 봄이다. 피 터지는 노래도, 사랑도, 열정도 없지만,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내 봄이다. 늦봄이 온 것이다.
언제 봄이 이토록 어여쁘고, 애틋하고, 애석하던가. 세상 모든 것이 한정(限定)이 있다는 것을 환이 아는 지금. 호수에 적신 햇살도 한정이 있고, 실버들 연둣빛도 한정이 있으며, 따사로운 봄바람도 한정이 있다. 한정을 모르던 시절의 봄은 가면 또 오고, 오면 또 가는, 애석할 것도 애틋할 것도 없는 계절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한정을 알고 맞는 늦봄 오늘 이 한 때는, 가슴이 젖도록 절절하다.
햇볕을 노 맞고 있어도 싫지 않다. 따뜻하게 데워진 겉옷에서 전해오는 열감이 좋다. 겨울 동안 수축되었던 혈관과 세포와 신경이 원활하게 순환을 한다. 내 안의 또 하나의 내가 눈부시게 하얀 뚝방길을 내닫는다. 그리고 또 하나의 내 앞으로 햇살 하얀 뚝방길이 반 고흐의 노란집처럼 열렬하게 안겨온다. 짙은 파랑과 노랑으로 이분한 화폭 위에, 남부프랑스의 강렬한 햇볕을 올려 놓은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내 안에서 미친 듯이 꿈틀거리는 해바라기꽃 갈퀴가 솟아났었다. 내닫고 다가오는 역동 속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해바라기꽃 갈퀴가 다시 움직인다. 마음이 밝아진다. 몸도 살아나는 것 같다. 무슨 큰 일을 해낼 것도 같다. 그때처럼 달콤하거나 웅장하지는 않지만 진동이 인다.
그 진동에 몸과 마음이 고조된다. 사고(思考)까지 유연해진다. 요즈음 나는 마음 비우는 연습을 한다. 하루에도 수십 가지 구름이 떠올라서 어지럽히지만, 밖으로 내쫓아버리는 연습을 한다. 사랑하기 보다 미워하기가 더 힘든 미움도 몰아내는 연습을 한다. 그 연습이 지금은 조금 쉬워지는 것 같다. 한정이 있기에 한 순간이 안쓰럽고, 한정이 있기에 하고 싶은 일을 미루어서도 안 되지만, 한정이 있기에 버리기도 한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빼낼 수 없이 단단하던 옹이도 조금씩 부드러워진다. 무정해진 마음에 물기가 돈다. 사무치던 허무도 따뜻하게 바라보아진다. 그러나 버리고 비우는 일이 쉬운 것이 아니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당치않다. 색깔을 엷어지게 하는 연습이라면 용서가 될까. 농염한 봄볕이 마음을 너그럽게 한다.
뚝방을 따라 설치해놓은 스피커에서 서정성 짙은 노래가 흐른다. 2,30년 전에 불리었던 곡이다. 가슴이 촉촉히 젖어 든다. 하늘엔 하얀 구름이 둥실 떠있다. 호수 저 켠 의자에는 허리를 껴안은 연인들이 정답게 앉아있다. 아름다운 영상이다. 어느 뮤지션(musician)이 말했다. 바흐나 베토벤의 음악만이 클래식이 아니라 팝이나 발라드, 어느 장르를 가릴 것 없이 백 년 후에 들어도 가슴을 파고드는 음악은 클래식이라 생각한다고. 그 말에 나도 동의한다. 비단 음악뿐이랴.
내게는 봄도 클래식이다. 나물 캐는 성 옆에 앉아, 비당캐각시 안고 버들개비 불며 놀던 봄. 아슬아슬 씨달키다 종래는 끊어져버린 풀싸움질. 어머니 반짇고리 무명실 몰래 갖고 나와선, 죽어라 씨달키던 실싸움질. 입술 앙물고 씨달키기만 했지 언제 이겨본 기억은 없다. 실싸움도 풀싸움도 하잔 사람이 없어, 홀로 호숫가에 나와 앉은 지금. 그 봄은 영원한 나의 클래식이다.
배경 음악까지 깔린 봄날 속에 빠져있으면서도 가을을 느낀다. 사람 마음 속에는 알 수 없는 계절이 있다. 질서 없이 불쑥불쑥 드나드는 바람 같은 계절. 함께 앉아 저물도록 이야기 하고픈 누구를 생각한다. 따뜻한 손 마주잡고 끝없는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다. 그 이야기가 허황된 헛소리일지라도 로망(roman)으로 만들어 내 고독 곁에 두고 싶다. 둥치 큰 플라타너스를 함께 안고 싶고, 하늘 닿은 언덕배기에 올라 낭만을 뿌리고 싶다. 정서가 분수를 넘었는가. 하지만 일흔이 되어 처음 맞는 봄. 가슴이 아프면서도 황홀한 정감을 구태여 피하고 싶지 않다.
호수를 뒤로 하고 자주 다니는 등산로를 따라 산을 오른다. 골짜기 나무들은 잎을 피울 채비에 한창이다. 나는 인적을 피해 상수리 숲으로 찾아 들었다. 나무 밑에 깔린 낙엽을 베고 하늘을 향해 벌렁 누웠다. 두껍게 쌓인 낙엽이 포근하다. 잎이 피지 않은 검은 나뭇가지 사이로 보드라운 햇살이 비쳐 든다. 편안하다. 만족하다. 나는 종(種)을 넘고, 성(性)을 넘어선 한 생명체일 뿐이다. 지금 이 만족, 이 나이에 그런 구분이 무슨 의미이랴. 다 져버린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진달래 한 그루가 꽃을 활짝 달고 섰다. 그도 이제 사 봄인 모양이다.
큰 나무그늘에 치여서 지금에야 꽃을 피운 진달래. 수 많은 악조건과 싸우며 잊혀진 존재로 기다렸다가 결국엔 꽃을 피웠다. 찬란한 태양 아래서 모양새를 한껏 자랑할 운명은 타고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초라하지 않다. 나 또한 늦게 핀 진달래처럼 찬란한 기약은 없어도, 뻐꾹새 울음 한가로운 늦봄이 좋다.
버들개비…버드나무 가지 작은 토막. 여기서는 버들피리(경상도 방언)
성…………형이나 언니(경상도 방언)
씨달키다…시달구다.(경상도 방언) 여기서는 풀잎이나
실을 걸어서 쏠아대는 것을 말함.
비당캐각시…작은 막대기에 비당캐풀을 묶어서 쪽을 짓고 비녀를
꽂아서 노는 풀 인형
비당캐풀…..부추처럼 부드럽고 긴 잎을 가진 여러 해 살이 풀(경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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